삼승할망
꽃을 피워 생명을 점지하는 제주의 산육신

정의
삼승할망은 한 신의 자리가 다른 신의 자리로 옮겨가는 과정을 정면으로 다룬 신이다. 제주도 무속에서 아기의 점지·출산·양육을 관장하는 산육신(産育神)이지만, 그 자리에 도달하려면 본래 있던 또 다른 여신을 밀어내야 했다. 「삼승할망본풀이」는 그 자리 바꿈의 내력을 푸는 서사무가다.
서사
두 여신의 자리 다툼
「삼승할망본풀이」의 줄거리는 두 여신의 만남과 대립으로 압축된다. 동해용왕따님아기는 부모에게 불효한 죄로 무쇠 석함에 갇혀 바다에 버려졌다가 인간 세상에 닿았고, 자식 없는 임 박사에게 발견되어 그의 부인에게 아기를 점지한다. 그러나 정작 아기를 어떻게 낳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잉태시킬 줄은 알았으나 해산시키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인간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부인이 죽음에 이를 지경이 되자 임 박사는 옥황상제에게 호소했고, 옥황은 명진국따님아기를 새로운 산육신으로 보낸다. 두 여신은 같은 자리를 두고 다투다 옥황의 명에 따라 꽃가꾸기 시합을 벌이고, 번성꽃을 피운 명진국따님아기가 이긴다. 그리하여 명진국따님아기는 인간 세상의 잉태·출산·양육을 관장하는 삼승할망이 되고, 동해용왕따님아기는 열다섯 살 전에 죽은 아이들을 거두는 저승할망(구삼승할망)이 된다.신의 출생에서 인간의 출생으로
이 줄거리가 흥미로운 까닭은, 표면적으로는 두 여신 사이의 자리다툼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훨씬 더 큰 이행의 과정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제호는 동해용왕따님아기를 단순한 패배자로 읽지 않는다. 그녀는 명진국따님아기에 앞서 본래 산육신의 자리에 있던 인물이며, 그 자리에서 밀려난 까닭은 그녀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산육신이 담당해야 할 출산의 성격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해용왕따님아기가 시도한 출산 방식, 곧 임신부의 겨드랑이로 아기를 꺼내려 한 시도는 일반적인 출산에서는 명백한 실패이지만, 신화 안에서 겨드랑이 출산은 신의 출생을 규정짓는 가장 특징적인 모티프 중 하나다. 동해용왕따님아기의 시도는 인간의 출산이 아니라 신의 출산을 시도한 것이었고, 그 시도가 인간 세상에서는 죽음을 부르는 행위가 되었다는 것이 이 신화의 결정적인 균열이다.
이 균열을 메우기 위해 옥황은 명진국따님아기를 보낸다. 명진국따님아기는 옥황으로부터 인간을 잉태시키는 방법과 해복시키는 방법을 새롭게 배워와 산육신의 자리에 들어선다. 두 여신의 대립은 결국 산육신의 직능이 신화적 출생에서 인간적 출생으로 옮겨가는 거대한 이행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신을 낳던 자리가 인간을 낳는 자리로 바뀌고, 그 자리에 적합한 신이 새로 들어선다. 동해용왕따님아기는 그 이행 과정에서 자리를 잃은 옛 신이며, 명진국따님아기는 새 시대에 맞춰 새로운 출산 방식을 익혀온 새 신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패배한 옛 신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해용왕따님아기는 산육신의 자리에서 밀려난 뒤 그대로 소멸하는 대신, 명진국따님아기의 정반대 위치, 곧 아이들에게 질병을 가져오고 열다섯 살 전에 죽은 아이들을 거두는 저승할망으로 변모한다. 김헌선은 이 구조를 두고 동일한 성격을 가진 두 신이 대립하면서 한쪽은 생산신으로, 다른 한쪽은 죽음신으로 분화되어 좌정하는 신화적 구조라 분석한다. 산육신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척점에 반드시 죽음과 질병을 관장하는 또 다른 신이 함께 있어야 작동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허약하여 여러 질병을 앓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현실 자체가, 한 신이 아니라 두 신의 짝을 요구한 것이다.
「삼승할망본풀이」가 보여주는 것은 곧 한 신앙의 분화가 어떻게 한 신화 안에 압축되는가의 과정이다. 본래 하나였던 산육신이 인간 출산이라는 새로운 직능을 받아들이면서 두 신으로 갈라지고, 갈라진 두 신이 각각 생명과 죽음을 나누어 맡으며 함께 작동하는 구조. 동해용왕따님아기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그녀가 본래 그 자리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자, 그녀 없이는 명진국따님아기의 자리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징
「삼승할망본풀이」의 신화적 특징은 두 여신의 자리 이행을 둘러싼 네 가지 모티프, 곧 꽃 가꾸기 시합, 서천꽃밭, 세 신의 관계, 그리고 ‘생불’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 꽃 가꾸기 시합이다. 두 여신은 누가 산육신의 자리에 들어설지를 두고 다투다가, 옥황상제의 명에 따라 꽃 가꾸기로 그 자리를 결정한다. 명진국따님아기가 심은 꽃은 사만 오천육백 가지의 번성꽃을 피우고, 동해용왕따님아기가 심은 꽃은 한 가지에 한 송이의 시드는 꽃만 피운다. 이 시합이 흥미로운 까닭은, 산육신의 자격이 힘이나 권능이 아니라 ‘꽃을 피우는 능력’으로 판가름된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의 생명을 꽃에 비유하고, 그 꽃을 피우는 자가 곧 생명을 점지하는 자라는 발상이 이 시합의 핵심이다. 신화를 창조한 집단이 인간의 생명체계를 식물의 생장체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며, 이 인식 위에서 다음의 모든 모티프가 자라난다.
두 번째는 서천꽃밭이다. 명진국따님아기는 시합에 이긴 뒤 하늘에서 꽃씨를 받아 석해산에 심고, 그곳에 ‘서천꽃밭’을 만든다. 서천꽃밭에는 생불꽃(아기꽃, 생명꽃)이 피어 있으며, 생불할망은 이곳의 꽃을 따다가 부부 사이를 다니며 아이를 잉태시킨다. 꽃의 색깔과 방향에 따라 아이의 운명이 달라지는데, 동쪽의 푸른 꽃이면 남자, 서쪽의 흰 꽃이면 여자, 북쪽의 검은 꽃이면 단명, 남쪽의 붉은 꽃이면 장명, 중앙의 황색 꽃이면 만과출세를 한다. 인간을 탄생시키는 꽃이 별도의 신화적 공간에 자라고 있다는 발상은 「삼승할망본풀이」가 한국 무속신화 가운데 가장 시적인 자리에 가닿는 대목이다. 인간의 생명이 어느 날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미리 피어 있던 꽃이 한 가족의 집으로 옮겨 심어지는 일이라는 인식. 산육신의 일은 그 꽃을 따서 옮기는 손길이며, 한 아이의 운명은 그 꽃이 어느 자리에서 피어 있었는가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다.
세 번째는 세 신의 관계다. 본풀이 안에서는 명진국따님아기(삼승할망), 동해용왕따님아기(구삼승할망), 그리고 마마를 앓게 하는 대별상신, 세 신이 함께 등장한다. 삼승할망이 아이를 잉태시키고 양육하는 신이라면, 구삼승할망은 그 아이들에게 질병을 가져오고 열다섯 살 전의 죽음을 거두는 신이며, 대별상신은 아이들에게 마마를 앓게 하는 신이다. 이 세 신의 관계는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긴장과 화해의 구조를 이룬다. 「마누라본풀이」에서 삼승할망은 자기가 생불을 준 아이들에게 마마를 곱게 앓게 해달라고 대별상신에게 간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대별상신의 부인을 잉태시키고 해복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그를 굴복시킨다.¹⁰ 생명을 주는 신이 다른 신을 굴복시키는 방식이 곧 또 다른 생명을 잉태시키되 해산시키지 않는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산육신의 능력이 생명을 주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주지 않거나 멈춰 세우는 데에도 있다는 사실. 삼승할망의 양가성이 「마누라본풀이」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자리다.
마지막은 ‘생불’이라는 이름 그 자체다. 삼승할망의 또 다른 이름인 ‘생불할망’에서 ’생불(生佛)’은 흔히 ‘불을 생기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불’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라 ‘아기’ 혹은 ‘인간’을 가리키는 옛말이다. 고대 한국어에서 인간이나 아기를 ‘불’이라 부르던 흔적은 남성 신체어 가운데 ‘불알’이라는 단어에 지금도 남아 있다. 생불꽃이 곧 아기꽃이고, 생불할망이 곧 아기할망이라는 사실은 이 신화가 매우 오래된 언어층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한 신의 이름 안에 한국어가 인간의 생명을 부르던 가장 오래된 호명이 보존되어 있는 셈이다.
변형
「삼승할망본풀이」의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신화 안에서 일어난 자리 이행이 신화 바깥의 현실에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제주도에서 삼승할망이라는 이름은 신화 속 여신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현실에서 산육을 담당하던 나이 든 여성, 곧 산파나 무녀 가운데 남다른 능력을 보이던 이들 또한 살아 있을 때부터 삼승할망이라 불렸다.41) 신화의 신과 현실의 인간이 같은 이름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 명명은 단지 호칭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살아생전 삼승할망으로 불리던 여성이 죽으면, 제주도에서는 그녀를 집안의 조상신으로 모신다. ‘불도일월조상’이라는 이름이 그것이다.42) 한국 본토에서 삼신을 집안의 가신(家神)으로 모시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지만, 제주도의 경우는 신화 속 삼승할망과 현실의 삼승할망과 사후의 조상신이 한 이름의 세 층위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 입체적이다. 신화 속 여신의 자리가 현실의 인간 여성에게 이행하고, 그 여성이 다시 사후에 조상신으로 이행하는, 세 겹의 이행이 한 이름 안에 포개진다.
이러한 사후 좌정의 사례는 제주도의 다른 일월조상 신앙과 한 줄로 묶인다. 택일·지관·의원을 하던 조상은 책불일월(冊佛日月)로, 벼슬을 했던 조상은 홍부일월(紅府日月)로, 수렵과 도살업을 하던 조상은 산신일월(山神日月)로, 심방(무당) 일을 하던 조상은 당주일월(堂主日月)로 모셔진다. 생전의 삶의 내력 자체가 사후에 그 집안의 조상신이 되는 계기가 되는 셈이다. 삼승할망 또한 이 계보 안에서, 생전에 아이를 받던 손길이 사후에는 그 집안의 산육을 지키는 신격의 손길로 옮겨간다.
가장 흥미로운 변형은 ‘넉산’이라 불리는 무덤 형태에서 발견된다. 넉산은 ‘넋 들이는 무덤’이라는 뜻으로, 생전에 삼승할망으로 남다른 영험을 발휘하던 이가 묻힌 자리를 가리킨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무덤에 가서 아이의 산육을 기원하며, 단골 삼승할망이 죽어 사라진 자리에서도 신통한 영험이 이어진다고 믿는다. 이 사례에서 삼승할망이라는 신앙은 신화의 영역, 현실의 영역, 사후의 영역을 모두 통과하면서도 같은 손길로 같은 일을 한다. 아이를 받아내는 손길은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동일하게 산육의 자리를 지킨다.
「삼승할망본풀이」의 두 여신이 산육신의 자리를 두고 신화 안에서 이행을 이루었다면, 현실의 삼승할망들은 그 자리를 신화 바깥의 시간 안에서, 곧 한 인간의 일생과 그 일생을 넘어선 사후의 시간 안에서 다시 한 번 이행해 낸다. 신화 속 여신의 자리가 현실의 인간 손길로 옮겨가고, 그 손길이 다시 무덤 너머의 영험으로 옮겨가는, 삼승할망이라는 한 이름은 결국 그 모든 이행을 한 자리에 모아 부르는 호명인 셈이다.
창작 활용 포인트
삼승할망이라는 신을 현대로 옮길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이 신이 본래 두 얼굴을 한 몸에 지닌 존재였다는 사실에 있다. 「삼승할망본풀이」에서 명진국따님아기와 동해용왕따님아기는 서로 다른 두 신처럼 그려지지만, 학술적 해석을 따라가면 두 여신은 본래 같은 자리의 두 얼굴이었다. 생명을 점지하는 손길과 그 생명을 거두어가는 손길이 한 신의 양손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한 손으로 아이를 낳게 하면서 다른 손으로 그 아이의 수명을 정하는 신. 이 모순이야말로 삼승할망이라는 신이 본래 안고 있던 가장 깊은 결이며, 현대의 창작이 가장 매혹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지점이다.
이 결을 따라가면 한 캐릭터가 떠오른다. 어느 날 자신에게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을 깨달은 인간. 그러나 그 능력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끝내 자신이 직접 거두어야 한다는 조건. 혹은 그 능력을 한 번 쓸 때마다 자신의 수명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조건. 탄생의 권능과 소멸의 의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캐릭터의 정체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점지한 생명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생명을 끝내야 한다. 자신이 빚어낸 것에 가장 깊이 마음이 가지만, 그 마음의 무게만큼 자기 수명이 깎인다.
이런 캐릭터는 단순한 선도 아니고 단순한 악도 아니다.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렵고, 매혹적이면서도 불온하다.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그 손길로 누군가의 생명을 거두기도 하며, 그 두 일이 그녀에게는 같은 손짓이다. 이상하고 불쾌하며 동시에 매혹적인 빌런. 어딘가 기이하지만 사랑스러운 신. 두 표현이 모두 가능한 까닭은 그녀가 본래 두 얼굴이 한 몸에 깃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발상은 작가 자신의 일과도 닿아 있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본래 양가적인 행위다. 인물 하나를 만들어내는 일이 곧 그 인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며, 페이지 위에 한 사람을 세워내는 손길은 동시에 그 사람을 종이 안에 가두는 손길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을 가장 잔인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빚어낸 것을 끝내 자기 손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삼승할망의 손길이 작가의 손길과 닮아 있다는 발견은, 이 신화를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창작이라는 행위 그 자체의 원형으로 다시 읽게 만든다.
삼승할망을 현대로 옮긴다면 그것은 결국 한 인간 안에 두 신을 동시에 살게 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생명을 주는 자와 거두는 자, 빛의 자리와 그늘의 자리를 한 몸에 지닌 채 살아가는 누군가. 그녀가 아이를 점지할 때마다 자기 수명이 줄어든다면, 그녀가 누군가를 사랑할수록 자기 그림자가 길어진다면, 그녀는 어떤 얼굴로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삼승할망본풀이」가 두 여신으로 나누어 그린 이 모순을, 현대의 다시 쓰기는 한 인간 안에서 다시 만나게 할 수 있다. 그것이 어쩌면 신화 안에서 갈라졌던 두 여신이 가장 멀리까지 도착하는 자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