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의 귀녀
죽음 이후에야 자기 자신을 발화한 명혼소설의 여성

정의
「만복사저포기」의 귀녀는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화한 여성이다. 왜구의 난 중에 살해당한 양반가의 처녀로, 살아 있을 적의 그녀에 대한 기록은 텍스트 안에 거의 비어 있다. 그러나 죽은 뒤 양생과 맺은 사흘간의 인연 안에서, 그녀는 부처에게 거짓을 고하고 양생을 선택하고 자기 사연을 직접 발화하는, 살아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능동성을 행사한다.
서사
황망한 죽음
귀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본래 전라도 남원의 한 양반 가문의 딸이었으나, 왜구의 난 중에 부모와 헤어진 채 살해당했다. 정절을 지키려 했던 그녀의 죽음은 황망한 것이었고,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개령동(開寧洞)에 가매장한 채 매년 대상(大祥)을 치르며 그녀의 혼을 위로해 왔다. 그녀가 죽은 자리는 폐쇄적인 자들의 공간이었고, 살아 있는 세상과는 단절된 채 시간이 멈춘 곳이었다.의지의 만남
사월 초파일, 만복사라는 절에 양생이라는 한 사내가 외로움에 못 이겨 부처와 저포놀이를 벌이며 자기에게 짝을 보내달라고 빌고 있을 때, 그녀가 나타난다. 강혜진은 이 만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양생이 저포놀이를 통해 주조한 ‘만든 운명’은 양생이 모르는 또 다른 운명의 흐름,귀녀의 의지가 개입한 흐름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생은 자기가 만든 운명의 주연 배우라 믿었겠지만, 실은 그 각본의 한쪽은 이미 다른 자의 손에 쥐여 있었다.부처에게 고한 거짓
귀녀가 부처 앞에서 자기 사연을 적어 올린 글에서 그녀의 능동성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그녀는 그 글에서 자신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다만 외로이 홀로 거처하는 여인이라 고 자신을 소개한다. 부처가 그녀의 정체와 죽음의 내막을 모를 리 없음에도, 귀녀는 부처에게 거짓을 고한다. 강혜진은 이 점에 주목해, 귀녀의 글이 본래 부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양생을 겨냥해 쓰였다고 본다. 양생과의 인연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감추는 거짓을 의도적으로 골랐다. 죽은 자의 자리에 갇혀 있던 그녀가 살아 있는 사내 앞에 자신을 새롭게 호명하기 위해 동원한 첫 번째 도구가 바로 그 거짓이었다.공적 의례로의 인도
이후의 사흘 동안 귀녀는 양생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가고, 그와 부부의 연을 맺으며, 자기 가족이 매년 치러온 대상의 자리로 그를 이끈다. 보련사(寶蓮寺)에서 치러진 그 대상의 자리에서 양생은 처음으로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다. 그녀가 3년 전에 죽은 여인의 혼령이라는 사실이 가족과 친척과 승려들 앞에서 드러나는 장면이지만, 흥미롭게도 가족들 또한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그녀의 회귀는 양생만의 비밀이 아니라 공적으로 확인되는 사건이며, 그녀는 자기 가족의 자리로 돌아와 자기 죽음을 마주하는 자리에 양생을 세운다.
대상이 끝난 뒤 그녀는 양생에게 작별을 고하고 사라진다. 어느 날 밤 그녀는 마지막으로 양생에게 말을 전한다. 자신은 타국에서 남자로 다시 태어났으니 양생도 불도를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는 당부였다. 양생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전해진다.역설적 구조
귀녀의 서사가 독특한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줄도 발화하지 못했던 그녀가 죽음을 거쳐서야 비로소 모든 선택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이다. 부처에게 거짓을 고한 것도 그녀이고, 양생을 자신의 거처로 데려간 것도 그녀이며, 자기 가족의 대상 자리로 양생을 이끈 것도 그녀다. 양생은 그녀가 만든 운명의 흐름을 따라가는 자리에 있었을 뿐, 그 흐름을 빚어낸 것은 줄곧 그녀였다. 죽음이 그녀에게서 빼앗은 것은 살아 있는 시간이었지만, 죽음이 그녀에게 부여한 것은, 살아 있는 시간동안 결코 허용되지 않았을 발화권과 선택권이었다.
특징
귀녀의 특징은 그녀의 능동성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를 따라가면 드러난다. 「만복사저포기」는 이 능동성의 무대를 세 가지 차원에서 구체화한다. 세 개의 공간, ‘만든 운명’의 구조, 그리고 그녀의 가시성 자체의 변화다.
먼저 세 공간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만복사,개령동,보련사라는 세 곳에서 펼쳐지는데, 신희경의 분석에 따르면 이 세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과 해원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적 무대다. 만복사는 산 자의 거처이자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공간이고, 개령동은 죽은 자의 거처이자 시간이 멈춘 폐쇄적인 공간이며, 보련사는 두 세계의 중간에 놓인 제3의 공간이다. 귀녀는 이 세 공간을 차례로 통과하며 자신의 능동성을 점점 더 넓은 자리로 확장한다. 만복사에서는 양생 한 사람 앞에서, 보련사에서는 자기 가족과 공동체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호명하는 것이다. 그녀가 죽음 이후 머물러 있던 자리(개령동)가 가장 폐쇄적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공간 이동은 그녀가 죽음의 침묵에서 산 자들의 발화 가능한 자리로 한 걸음씩 옮겨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만든 운명’의 구조다. 양생은 부처에게 저포놀이를 걸어 자기 짝을 얻고자 했고, 그 결과로 귀녀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강혜진은 이 만남을 “양생이 만들어낸 운명”으로 분석하면서, 이 만든 운명에 본질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음을 짚는다. 본래 운명이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양생은 저포라는 우연의 도구를 통해,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건, 양생이 만들었다고 믿은 운명의 실제 주체가 그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있다. 강혜진의 통찰에 따르면 운명의 흐름은 양생이 모르는 또 다른 의지, 즉 귀녀의 의지와 결합되어 있다. 양생은 자기가 만든 짝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귀녀가 그를 자기 인연으로 선택한 것이다. 만든 운명이라는 모순적 구조 안에서 능동성의 주체가 양생에게서 귀녀에게로 슬그머니 옮겨가는 장면이, 「만복사저포기」가 다른 명혼소설들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자리다.
세 번째는 그녀의 가시성 자체의 변화다. 만복사에서 처음 양생을 만났을 때 그녀를 인지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양생뿐이었다. 그러나 보련사에서 대상이 치러질 때는 그녀의 부모와 친척, 그리고 승려들까지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녀와 양생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으려 한다는 정황이 그 사실을 증언한다. 즉 귀녀는 자기 이야기를 사적인 둘만의 시간에 그치게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가족의 공적인 의례 자리로 자기 존재를 끌고 갔으며, 그 자리에서 자기 죽음과 자기 인연을 공동체 전체가 함께 인지하도록 만들었다. 살아 있을 적의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자리조차 갖지 못했지만, 죽음 이후의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공적인 무대에 올린 주체가 된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나타낸다. 귀녀의 능동성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며, 죽음을 거쳐서야 비로소 점점 더 넓은 자리에서 작동하게 된, 능동성이다. 그녀의 능동성은 살아서 발화하지 못했던 한 여성이, 죽음 이후에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시 빚어내는가의 과정이기도 하다.
변형
「만복사저포기」는 김시습의 한문소설집 『금오신화』 안에서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과 함께 명혼소설(冥婚小說) 또는 시애소설(屍愛小說)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생규장전」 역시 산 자와 죽은 자의 사랑을 다루지만 두 작품의 결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생규장전」에서는 이생과 최씨가 살아 있을 적에 이미 사랑을 시작했고 그 사랑이 죽음을 거쳐 이어지는 데 비해, 「만복사저포기」의 귀녀는 살아 있을 적의 인연 자체가 없는 채로 죽음을 거쳐서야 비로소 양생과 만난다. 「이생규장전」이 죽음을 사랑의 연속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그렸다면, 「만복사저포기」는 죽음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자리로 그린 것이다.
이 차이는 한국 명혼소설 전통 안에서 「만복사저포기」의 귀녀가 차지하는 자리를 분명히 한다. 이후의 명혼소설들인 신광한의 「하생기우전(何生奇遇傳)」을 비롯한 후대 작품들에서도 죽은 여인이 산 남자와 만나는 구조는 거듭 변주되지만, 귀녀처럼 자신의 죽음을 숨기는 거짓을 능동적으로 동원하거나 자기 가족의 공적 의례 자리에까지 양생을 끌고 가는 적극적 주체로 그려진 사례는 드물다. 한국 명혼소설사에서 귀녀는 죽음 이후의 여성이 어디까지 능동적일 수 있는가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 이르러 영화, 드라마, 소설로 재창작되는 명혼서사의 다수가 「만복사저포기」를 원형으로 호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작 활용 포인트
「만복사저포기」의 원작에서 귀녀는 죽음 이후에야 능동성을 얻은 여성이지만, 그 능동성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양생을 자기 인연으로 선택했고 부처에게 거짓을 고할 정도로 의지를 행사했지만, 끝내 윤회의 흐름에 자신을 내주고 타국의 남자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양생과 영원히 갈라진다. 사흘간의 능동성이 그녀의 마지막 능동성이었고, 그 너머에는 더 큰 운명의 손길이 그녀를 다시 거두어 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인물이 현대의 손에 다시 쓰일 때, 그 마지막 굴복의 자리를 거부하는 귀녀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귀녀 다시 쓰기의 출발점은 설정의 전환이다. 귀녀가 사실은 단순히 죽은 양반가의 처녀가 아니라, 저승을 다스리는 존재였다고 하자. 양생 또한 만복사에서 외로움에 잠긴 한낱 사내가 아니라, 지상의 축복을 받아 이승을 지키는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고 해보자. 양생(梁生)이라는 이름이 본래 “삶을 키우는 자”라는 뜻에 가깝게 읽힌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 설정은 텍스트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만복사에서의 두 존재의 만남은 외로운 사내와 가엾은 죽은 여인의 만남이 아니라, 저승의 지배자와 이승의 수호자의 마주침이 된다. 약자가 강자에게 청하는 자리가 아니라, 두 강자가 한 자리에서 부딪치는 자리.
이 설정 위에서 귀녀의 거짓은 새로운 무게를 갖는다. 그녀의 거짓은 더 이상 한 사내의 마음을 얻기 위한 사적 술수가 아니다. 그것은 이승이라는 한 세계를 자기 손에 가져오기 위한 정교한 중상모략이 된다. 그녀는 양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양생을 갈취한다. 양생의 시간과 양생의 자리와 양생이 지키는 세계를 자기 것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녀는 순한 얼굴로 거짓을 짓고, 그 거짓을 부처의 자리 앞에까지 가져간다. 부처조차 속이는 거짓이 아니라, 부처도 알면서 막을 수 없는 거짓. 그녀의 거짓이 무서운 까닭은 그것이 명백한 악이 아니라 사랑의 외양을 한 채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캐릭터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녀가 선과 악,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 서사의 오랜 전통은 욕망하는 여성을 두 자리로만 호명해 왔다. 성녀이거나 악녀이거나, 정절을 지킨 여인이거나 사내를 홀린 마녀이거나. 필자가 상상하는 귀녀는 그 두 자리의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양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양생을 도구로 삼고, 자기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욕망을 사랑이라 부르는 데 망설임이 없다. 성녀와 악녀의 이분법은 그녀 앞에서 한 번에 무너진다. 그녀가 보여주는 것은 두 자리 가운데 어느 쪽이 아니라, 두 자리를 모두 통과한 뒤 그 너머에서 자기 욕망을 끝까지 쥐고 가는 한 여성의 얼굴이다.
귀녀 다시 쓰기의 마지막 단계는 그녀의 결말에 있다. 원작의 귀녀는 자기 인연을 얻은 뒤에도 윤회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사라졌지만, 필자가 상상하는 귀녀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양생을 끝내 가져오고, 이승의 자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그 자리에 단단히 발을 디딘다. 한국 서사에서 욕망하는 여성은 늘 처벌받거나, 죽음을 거쳐서야 발화하거나, 신성의 자리로 격상되어 비인간이 되어야만 욕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귀녀는 그 모든 조건을 깨고 욕망을 이루는 자리에 도착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뻐한다. 자기가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가 가져온 방법을 후회하지 않으며, 자기 욕망의 결과를 온전히 즐긴다.
이 귀녀는 어쩌면 한국 서사가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욕망하는 여성, 욕망을 이루는 여성, 그리고 그 욕망의 성취를 기뻐하는 여성. 「만복사저포기」의 사흘이 그녀에게 처음으로 능동성을 부여한 자리였다면, 이 다시 쓰기는 그 능동성이 끝내 자기 자리를 굳히는 이야기다.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던 한 여성이, 죽음을 도구 삼아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끝내 갈취해 내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