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감호의 호녀
자기를 세 번 부정해야 사랑에 닿은 호랑이 여인

정의
김현감호의 호녀는 자기 자신을 세 번 부정해야만 한 남자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여성이다. 자기 종족인 호랑이 가족을 등지고, 자기 정체인 호랑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며, 끝내 자기 목숨까지 자기 손으로 거둠으로써 사랑하는 인간 남자 김현에게 출세의 기회를 안긴다. 한국 고전 서사가 그려낸 여성의 자기희생 가운데 가장 극단까지 밀고 나간 사례다.
서사
첫 만남
호녀의 이야기는 신라 흥륜사(興輪寺)의 탑돌이에서 시작된다. 신라에는 매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흥륜사의 전각과 탑을 도는 복회(福會)가 있었는데, 원성왕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인간의 모습으로 섞여 들어가 염불을 하며 탑을 돌고 있었다. 호랑이가 사람의 자리에 발을 디딘 첫 순간이었으나, 그녀는 이 자리에서 화랑 김현과 시선이 마주쳤고 서로 감정이 통하게 되었다. 탑돌이를 마친 뒤 김현이 그녀를 으슥한 곳으로 이끌어 관계를 맺었고, 그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굳이 뒤를 따랐다. 그녀는 거절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왔다.첫 번째 부정(종족)
산기슭 초막에 도착한 그녀는 자기 본래의 세계로 김현을 들이게 된다. 노파(어머니)가 김현을 안에 숨겼으나, 곧 그녀의 남형제인 세 호랑이가 돌아와 사람 냄새를 맡고 으르렁거렸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세 호랑이가 즐겨 사람의 생명을 많이 해치므로 한 마리를 죽여 악행을 징계하겠다.” 세 호랑이가 근심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린다. 자신이 오빠들 대신 벌을 받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부정이 이 자리에서 이뤄진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 죄를 대신 짊어지고, 종족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선택이다.두 번째 부정(정체)
그녀는 곧이어 김현에게 자신의 죽음을 직접 부탁한다. “나는 비록 그대와 유(類)가 다르지만 이미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제 내가 집안의 재앙을 막기 위하여 대신 죽고자 하는데,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그대의 칼에 죽어 은덕에 보답하고자 한다.“ 그녀의 두 번째 부정이 여기서 일어난다. 자기 종족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 자체를 인간 남자의 칼 아래로 내려놓는 결단이다. 김현이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그녀는 거듭 설득한다. 자기가 죽음으로써 김현과 자기 집안과 나라에 복이 된다는 것이 그녀가 내세운 이유였다. 다만 자신이 죽은 뒤에 절을 세우고 불경을 읊어 좋은 과보를 만들어 달라 청한다.세 번째 부정(목숨)
다음 날 그녀는 약속한 대로 성안에 사나운 호랑이로 나타난다. 그녀의 자기 부정의 마지막 단계는 이 장면에서 완성된다. 김현이 벼슬을 걸고 호랑이를 잡으러 나서자, 그녀는 다시 처녀의 모습으로 변해 반갑게 웃으며 김현을 맞이한다. 호랑이에게 공격받아 다친 사람들에게 흥륜사의 간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팔소리를 듣게 하면 나을 것이라는 치료 방법까지 직접 알려준 뒤, 그녀는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자기 손으로 뽑아 자기 목을 찔러 쓰러져 호랑이가 되어버린다. 종족을 등지고, 정체를 부정하고, 끝내 목숨까지 스스로 거두는, 즉 한 여성의 세 겹 자기 부정이 한 칼에 완성되는 자리다.자발성으로 포장된 자기희생
이 자리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죽음의 칼을 김현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 손으로 거둔다는 것이다. 목숨을 끊는 마지막 행위마저도 그녀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는 건 그녀의 죽음이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완성된 행위라는 외양을 갖추게 한다. 그러나 김경미는 이 점이야말로 가부장적 서사 장치의 가장 정교한 자리라고 짚는다. 자발성으로 포장된 자기희생이 곧 남성 세계가 여성에게 강요한 무한한 헌신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이 가능한 자리 자체가 이미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마련되어 있었다.비대칭성
이 일로 김현은 벼슬에 올랐고, 호녀의 청에 따라 호원사(虎願寺)라는 절을 세워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김현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이 일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 기록의 이름이 「논호림(論虎林)」이다. 호녀의 이야기는 한 인간 남자가 자기 죽음에 임박해서 입을 열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에게 도착한다. 그녀는 살아서 자기 이야기를 직접 발화할 자리를 갖지 못했고, 죽음 이후에도 본인 이야기는, 자신을 죽인 남자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 「김현감호」가 한국 고전 서사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한 여성의 자기 부정이 어떻게 한 남자의 회고록 안에 보존되는가의 구조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인 듯하다.
특징
「김현감호」의 호녀가 한국 고전 서사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세 가지 구조적 특징을 통해 드러난다. 이물 결연의 비대칭성, 같은 책에 나란히 실린 또 한 명의 호녀와의 대비, 그리고 비극을 신성한 가치로 봉인하는 불교적 마무리다. 이 세 가지 특징이 모두 시선 한쪽 끝에서 본다면 사랑의 숭고한 가치를 드러내는 자리이지만, 다른 끝에서 본다면 한 여성의 자기 부정을 사회적으로 정당화하는 정교한 장치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이물 결연의 비대칭성이다. 호녀와 김현은 서로 다른 종족에 속한 두 존재이지만, 그들의 결연 안에서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호녀이고 자기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쪽은 김현이다. 호녀는 인간의 모습을 흉내내야 하고, 가족과 헤어져야 하고, 끝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김현은 화랑이라는 신분을 유지한 채로, 출세의 꿈을 그대로 가진 채로 그 관계 안에 머문다. 정출헌은 이 비대칭성의 본질을 짚어내며, 「김현감호」가 가문과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포획하기 시작하던 남성·가장 중심주의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분석한다. 호녀의 자기희생이 자발적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 자발성이 작동하는 자리 자체가 이미 한쪽에만 부정을 요구하는 구조 위에 마련되어 있었다.
두 번째는 같은 책 안의 또 한 명의 호녀, 곧 신도징의 호랑이 아내와의 대비다. 일연은 『삼국유사』 「김현감호」 조에 곧이어 중국 『태평광기(太平廣記)』의 신도징 이야기를 함께 실었다. 신도징의 아내 또한 호랑이가 변한 여성이지만, 그녀는 김현의 호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인간 남자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으나, 끝내 벽에 걸린 자기 가죽을 다시 입고 호랑이로 돌아가 산림으로 사라진다. 일연 본인은 김현의 호녀를 “숭고한 희생”으로 칭송하고 신도징의 아내를 “매정한 여인”이라 비난했지만, 최근의 페미니즘 비평은 이 평가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김현의 호녀가 자기 정체를 완전히 부정한 채 남성 세계에 동화된 사례라면, 신도징의 아내는 자기 세계를 끝내 긍정하는 또 다른 자존을 보여준 사례라는 것이다. 두 호녀가 한 책 안에 나란히 실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고전 서사가 호랑이 여인이라는 동일한 모티프를 두고 두 가지 정반대의 응답을 동시에 보존해 두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는 비극을 신성한 가치로 봉인하는 불교적 마무리다. 호녀의 죽음 이후 김현은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호원사(虎願寺)라는 절을 세우고, 「범망경(梵網經)」을 읊으며 호녀의 명복을 빈다. 학아남은 이 구조를 두고 「김현감호」 설화의 심층구조가 “세속적인 감통(感通)에서 거룩한 감통으로 발전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면, 이 불교적 마무리는 호녀의 비극을 신성한 가치로 승화시키는 동시에 그 비극의 정치적 무게를 봉인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절이 세워지고 불경이 읊어지면서, 호녀의 죽음은 한 여성이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강요받은 자기 부정의 사례가 아니라 한 영혼이 도달한 거룩한 자리로 다시 호명된다. 비극이 비극으로 남아 있지 않고, 종교적 의미 안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은 결국, 호녀의 이야기가 사랑의 숭고함을 그린 설화이면서, 동시에 그 숭고함이 어떤 구조 위에 서 있는가를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설화임을 말해준다. 한 여성이 본인을 세 번 부정한 끝에 도달한 자리가 신성한 가치로 칭송되는 구조는 「김현감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그 구조를 따라 읽어내는 일이 이 설화를 21세기에 다시 만나는 방식이다.
변형
「김현감호」의 변형은 호녀의 자기 부정이라는 핵심 구조를 어떻게 다르게 풀어내는가에 따라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호녀의 성별과 종족적 정체를 바꾸어 자기희생의 구조 자체를 그대로 유지한 변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기희생을 약화시키고 연애의 정서로 옮겨간 변주다.
첫 번째 변형은 고려 말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補閑集)』에 수록된 「호승(虎僧)」이다. 이 작품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호랑이는 처녀가 아니라 소년이며, 사랑의 상대가 아니라 스님이라는 점이 김현감호와 다르다. 그러나 호랑이 소년이 가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구조,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인간으로 환생해 스님이 된다는 불교적 마무리는 「김현감호」와 거의 그대로 겹친다. 흥미로운 것은 호랑이가 처녀가 아니라 소년으로 바뀌었을 때, 그의 자기희생이 더 이상 사랑의 자리가 아니라 불교적 깨달음의 자리로 옮겨간다는 사실이다. 「김현감호」에서 호녀의 자기 부정이 한 남자의 출세를 위한 자리에 놓였다면, 「호승」에서 호남(虎男)의 자기 부정은 종교적 환생이라는 더 큰 보상을 약속받는다. 자기 부정의 대가가 무엇으로 주어지는가는, 자기를 부정하는 자의 성별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두 번째 변형은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채록된 구술 변이형이다. 이 변이형에서는 호녀와 인간 남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기본 플롯은 유지되지만, 호녀의 자기희생이라는 비극적 결말은 약화되고 연애 모티프가 전면에 부각된다. 불법(佛法)이라는 거룩한 의미틀이 사라지면서, 호녀는 자기 종족과 자기 정체를 부정하는 비극적 존재가 아니라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신비로운 존재로 그려지게 된다. 이 변이는 「김현감호」가 후대로 오며 그 정치적 무게를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호녀라는 캐릭터가 자기희생의 구조에서 풀려나면 어떤 자리로 옮겨갈 수 있는가의 가능성을 살짝 비추기도 한다.
창작 활용 포인트
「김현감호」의 원작에서 호녀는 본인을 세 번 부정해야만 한 남자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었던 여성이다. 자기 종족인 호랑이 가족을 등지고, 정체성인 호랑이라는 존재도 부정하며, 끝내 자신의 목숨까지 스스로의 손으로 거두는, 즉 그녀의 사랑은 자기를 세 번 지운 끝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인물이 현대의 손에 다시 쓰일 때, 그 세 번의 부정을 세 번의 긍정으로 뒤집는 호녀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쓰기의 출발점은 정체성의 전환이다. 현대의 호녀는 자기가 호랑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정체로 긍정한다. 호랑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호랑이의 몸으로 도시를 걷고, 호랑이의 감각으로 사람의 냄새를 맡는 일이 그녀에게는 결핍이 아니라 풍요다. 원작의 호녀가 인간이 되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이 호녀는 자기가 호랑이이기에 사랑할 수 있는 자리들을 본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호랑이의 눈으로 보고,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 호랑이의 발로 닿는다. 호랑이라는 정체는 그녀가 부정해야 할 짐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두 번째 전환은 욕망의 주체로의 이동이다. 원작에서 호녀는 김현의 욕망 대상이었고 그의 출세를 위한 도구였지만, 현대의 호녀는 자기 욕망의 주체가 된다. 그녀는 인간과의 관계를 궁금해하고, 그중에서도 성적인 관계가 어떤 것인지 직접 알고 싶어한다. 그녀는 인간을 유혹하기로 결심하고, 호랑이의 감각을 그 유혹의 도구로 사용한다. 호랑이의 매혹적인 시선, 호랑이의 매끄러운 움직임, 호랑이의 흔들리지 않는 호흡. 종족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 전체가 그녀의 손에서 욕망의 도구로 다시 쓰이는 것이다. 본인을 부정하기 위한 자리에 놓였던 호랑이 정체성이, 욕망을 펼치기 위한 자리에서 다시 호명되는 것이다.
세 번째 전환은 욕망의 방향이 다양해지는 데 있다. 원작의 호녀가 한 인간 남자에게만 자기 모든 것을 내준 채 죽었다면, 현대의 호녀는 인간 남자와 인간 여자에게도 시선을 둔다. 그녀는 인간 남자가 의외로 유혹하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동시에 인간 여자가 그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인간 여자의 마음을 얻는 일은 호랑이의 어떤 감각으로도 단숨에 닿을 수 없는 자리이며, 바로 그 어려움이 그녀의 시선을 더 오래 붙들어둔다. 그녀는 자기가 눈여겨보는 한 여자를 호랑이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어진다. 사랑의 자리가 더 이상 본인을 인간 남자의 세계에 종속시키는 자리가 아니라, 호랑이의 세계로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자리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이 네 번째 전환, 즉 초대의 구조가 다시 쓰기의 결정적인 자리다. 원작의 호녀가 자기 세계를 끊고 김현의 세계로 들어가야 했다면, 현대의 호녀는 자기 세계로 누군가를 들이는 자리에 선다. 흡수당하는 자에서 흡수하는 자로의 전환이며, 종속의 자리에서 주체의 자리로의 이동이다. 그녀가 한 인간 여자에게 호랑이의 세계를 보여주기로 결심할 때,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다. 본인을 부정하던 자리에서 드러내는 자리로, 스스로를 숨기던 자리에서 초대의 호스트라는 자리로의 이동은, 그녀의 모든 행위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하는 것이다.
이 다시 쓰기가 가닿는 자리는 결국 한 가지 질문이다. 한국 고전 서사가 그려낸 호녀들이 모두 자기 종족과 자기 정체를 부정한 끝에야 사랑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었다면, 자기 종족과 자기 정체를 가장 강하게 긍정하는 호녀는 어떤 사랑을 가능하게 할 것인가. 그 사랑의 상대가 인간 남자가 아니라 인간 여자라면, 그리고 그 사랑이 자기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계로 누군가를 초대하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면, 한국의 호녀 서사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자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세 번 부정한 끝에 사라진 한 여성의 자리에서, 자신을 세 번 긍정한 끝에 세계의 주인이 된 한 여성의 자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