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노
양반을 잡아먹겠다 달려드는 경남 탈놀이의 정체불명 괴물

영노는 특정 인간의 억울한 죽음이나 원한에서 비롯된 존재가 아니다. 경남 지역의 탈놀이에서 양반을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상상의 동물로[1], 인간 세계에 개입하기 위해 하늘이나 다른 세계에서 내려온 존재로 묘사된다. 원한이 아니라 식욕과 징계의 욕구로 움직이는 요괴로 분류한다. 다만 영노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벽사와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함께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밝혀 둔다.
개요
경남 지역 탈놀이인 야류(野遊)와 오광대(五廣大)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이다.[2] '비비'라는 울음소리 때문에 비비새라고도 불린다. 가산오광대, 고성오광대, 김해오광대, 마산오광대, 통영오광대, 동래야류, 수영야류에 등장하며, 경남 지역 이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양반 아흔아홉 명을 잡아먹었고, 한 명만 더 잡아먹으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양반에게 달려드는 것이 영노 과장의 핵심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압도적인 식욕을 가졌으나 그 정체는 새인지 이무기인지 탈놀이마다 달리 묘사되곤 한다.
유래와 형성
영노가 탈놀이에 등장하는 배경에는 경남 지역 가면극의 기원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합천군 율지리에 전해지는 밤마리오광대 설화에 따르면, 큰 홍수가 났을 때 나무 궤짝 하나가 마을로 떠내려왔고, 그 안에는 가면과 함께 『영노전 초권(初卷)』이라는 책이 들어 있었다. 마을에 재앙이 끊이지 않던 때에 그 책대로 탈을 쓰고 연희를 하자 재앙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홍수와 궤짝, 가면의 구조는 천지창조 신화나 건국 신화의 원리와 상통한다. 이 설화에서 영노는 혼돈을 물리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신격의 자리에 놓인다.
야류와 오광대는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마을 동제와 함께 연행되었으며,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적 맥락 안에서 발전했다. [3]영노 과장은 양반 과장과 할미·영감 과장 사이에 배치되어 급박한 속도로 진행되면서, 앞뒤 과장의 완만한 흐름과 대비를 이루어 민속극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4]
특징
영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체를 고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통영오광대의 영노는 스스로를 '영노사(새)'라고 소개하면서도, 양반 백 명을 잡아먹으면 사룡(蛇龍)(뱀과 용 사이의 존재)으로 변해 하늘로 올라간다고 말한다. 같은 장면 안에서 새이기도 하고 이무기이기도 한 셈이다.[5] 수영야류의 영노는 천상에서 내려온 존재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날물에 날 잡아먹고 들물에 들 잡아먹는다"고 말해 수생동물의 면모를 드러낸다. 가산오광대의 영노는 사자 형상의 탈을 쓰고 등장해 다른 영노들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6]탈의 생김새 역시 야류마다 판이하게 다르다.
이처럼 영노가 새로도 이무기로도 인식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무기 설화를 보면, 이무기는 팔다리 없이 거대한 몸통으로 서 있으며 가축이나 사람을 한 입에 삼키는 존재로 묘사된다. 쇠뭉치에 미늘(낚시 바늘 끝,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갈고리)을 걸어야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크다.[7] 수영야류에서 영노가 "쇠뭉치는 쫀득쫀득 더 잘 먹는다"고 하는 대목은 이무기 설화와 직접 연결된다. 한편 이무기가 죽으면 그 몸속에서 새가 나온다거나, 삼천 년을 살면 기미새가 된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이는 이무기와 새가 민간에서 같은 계통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8]
영노와 양반의 대결 장면도 주목할 만하다. 양반은 자신이 양반이 아니라며 쇠뭉치, 그림자, 똥, 돼지, 구렁이, 뱀 등 온갖 것으로 정체를 바꾸어 가며 영노를 피하려 한다. 영노는 그것들도 모두 잘 먹는다고 맞받아친다.[9] 양반이 높은 가문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참양반임을 증명하려 하자, 영노는 "그런 양반을 잡아먹어야 득천을 한다"며 오히려 달려드는 구조다. 양반의 권위가 높을수록 영노에게는 더 먹어야 할 이유가 된다.[10]
창작 포인트
영노의 핵심은 정체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새이기도 하고 이무기이기도 하며, 어디에서 왔는지도 탈놀이마다 다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도 하고, 구렁에서 왔다고도 하고, 그냥 배가 고파 왔다고도 한다. 단 하나의 실체로 환원되지 않는 이 모호함은 영노를 단순한 괴수와 다른 존재로 만든다.
영노의 식욕도 흥미롭다. 살아 있는 것은 물론, 쇠뭉치나 그림자까지 먹는다는 설정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다. 영노가 삼키는 것들은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그 끝에 양반이 있다. 양반의 권위가 높을수록 영노에게는 더 먹어야 할 이유가 된다는 역설이 이 캐릭터를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체제를 뒤흔드는 존재로 만든다.
또한 영노는 무섭지만 익살스럽다. 아니, 정확히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익살스럽다. 양반이 "나는 사실 양반이 아닙니다"라며 목숨을 구걸하는 동안 영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쇠뭉치도 먹고, 그림자도 먹고, 똥도 먹는다고 흥겹게 받아치는 이 존재에게 양반의 변명은 그저 반찬 목록이 늘어나는 일일 뿐이다. 높은 가문을 줄줄이 읊을수록 오히려 더 맛있어진다. 체제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할수록 영노에게는 더 먹어야 할 이유가 생긴다. 웃기지만 잔인하고, 축제처럼 보이지만 누군가는 잡아먹히는 판. 그 양면성이 영노의 가장 강한 창작 자원이다.
각주
- 심상교, 「영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
- 김국희, 「야류·오광대 '영노'의 정체에 대한 시론」, 『한국민족문화』 71호,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9, 221쪽.
- 김국희, 앞의 논문, 222쪽.
- 심상교, 앞의 글.
- 김국희, 앞의 논문, 215~216쪽.
- 김국희, 앞의 논문, 218쪽.
- 김국희, 앞의 논문, 224~225쪽.
- 김국희, 앞의 논문, 226~227쪽.
- 심상교, 앞의 글.
- 김기형, 「탈춤 '영노(비비) 과장'에 나타난 갈등의 양상과 그 의미」, 『우리어문연구』 5호, 우리어문학회, 1991, 8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