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형랑
죽은 왕의 혼령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귀신을 부리는 존재

*사진 양직공도
비형랑은 인간과 귀신의 경계에서 태어난 존재로, 귀신을 부리고 통제하며 벽사(辟邪)[1]의 힘까지 행사한다. 사람이나 귀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로서, 독특한 위치를 가진다. 일반적인 귀신처럼 억울한 죽음에서 비롯된 원혼도 아니고, 단순한 자연신이나 신령으로 환원되지도 않는다. 인간 세계와 저승, 왕권과 귀귀(鬼鬼)의 세계를 동시에 넘나드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위키에서는 요괴로 분류한다. 다만 비형랑은 『삼국유사』에서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귀신들을 다스리고 국가 질서를 보조하는 존재로 묘사되며, 후대에는 벽귀 신앙과 연결되어 신격화되었다는 점을 함께 밝혀 둔다.
개요
신라 시대 설화에 등장하는 존재이다. 『삼국유사』[2] 「도화녀·비형랑」 조에 따르면, 진지왕의 혼령과 인간 도화녀[3] 사이에서 태어났다.[4] 생전 도화녀를 보고 반했던 진지왕은 죽은 이후 도화녀에게 찾아가 7일간 함께 있었다. 그 뒤 비형랑이 태어났고, 진평대왕은 그의 비범한 면을 깨닫고 궁으로 거둔다. 살아 있는 인간과 죽은 혼령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출생 자체가 인간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고 있다.
비형랑은 출생의 신묘함으로 인해 귀신을 부리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밤이면 귀신 무리를 거느리고 다녔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귀신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비형랑이 귀신들을 시켜 하룻밤 만에 다리를 놓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부리던 수하 중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가자, 귀신들을 불러 길달을 처치한다. 이것은 귀신을 물리치는 벽귀 신앙[5]의 기원과 연결된다. [6]
유래와 형성
비형랑 설화의 핵심은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는 귀태 서사에 있다. 설화 속 비형랑의 탄생 장면에는 오색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으며, 아이가 태어날 때 천지가 진동했다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흉조가 아니라 비범한 존재의 탄생을 암시하는 전조로 해석된다. [7]
비형랑은 이후 진평왕의 눈에 들어 궁중에서 자라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사회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다. 밤마다 귀신들과 어울려 다녔고,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두려워했다. 동시에 왕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귀신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긴다. 이러한 점에서 비형랑은 인간 사회 안에 있으면서도 끝내 인간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존재다.
후대 기록에서는 비형랑이 목랑(木郞) 혹은 두두리 신앙과 연결된다.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비형랑 이후 귀신을 물리치는 두두리 신앙이 성행했다고 기록한다.
특징
비형랑의 가장 큰 특징은 귀신과 인간 양쪽 모두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궁궐 안에서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귀신들과 어울려 다닌다. 『삼국유사』에서는 비형랑이 귀신 무리를 거느리고 다녔으며, 왕이 이를 시험하기 위해 귀신들에게 다리를 놓게 하자 실제로 하룻밤 만에 완성되었다고 전한다.
비형랑은 귀신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귀신을 통솔하는 존재다. 그래서 후대에는 벽귀(辟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경주 지역에는 문에 주문을 붙여 귀신을 막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비형랑과 연결해 ‘두두리’의 시작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8]
비형랑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두두리'는 고려 시대의 도깨비다. 곡식을 찧는 절구공이에서 출발한 이 존재는 불을 다루는 대장장이의 신으로 이어졌고, 형체를 자유로이 바꾸는 도깨비의 능력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도깨비가 불을 내지 않도록 달래는 굿이 남아 있다.
또한 비형랑은 왕권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폐위된 왕의 혼령에서 태어난 존재이며, 왕실 내부의 불안과 균열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비형랑 설화에는 단순한 괴담 이상의 정치적 긴장감이 배어 있다. 인간 세계의 질서에서 밀려난 존재가 귀신의 힘을 등에 업고 다시 왕권 가까이로 돌아온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비형랑이 흔히 ‘도깨비’의 원형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특히 드라마 『도깨비』 연구에서는 비형랑이 귀신을 제압하고 경계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현대 도깨비 캐릭터와 연결되었다. [9]
창작 포인트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의 불안
비형랑의 핵심은 ‘인간 세계에 발을 걸친 채 끝내 인간이 되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는 귀신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인간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인간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밤이 되면 귀신들과 어울린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캐릭터의 핵심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비형랑이 귀신과 협력해 거대한 일을 해낸다는 점이다. 하룻밤 만에 다리를 놓는 이야기는 인간 노동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귀신의 힘으로 실현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비형랑은 ‘괴물의 왕’이라기보다 인간과 귀신 세계를 중재하는 관리자, 혹은 위험한 조정자로 활용하기 적합하다.
필요악의 모순
또한 비형랑은 단순히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귀신들을 통제하고 몰아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 입장에서는 두렵지만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이 모순적인 위치는 매우 강한 긴장감을 만든다.
권력 암투 속 저주받은 존재
정치적 해석도 가능하다. 폐위된 왕의 혼령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설정은 왕권의 저주, 제거되지 못한 과거, 억눌린 권력의 귀환 같은 이미지와 연결된다. 궁궐 괴담이나 역사 판타지 장르에 활용하기 좋다.
각주
- 재앙을 막고 액을 극복하는 행위
- 一然, 『三國遺事』(1281년 추정 편찬).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국 고대의 신화·전설·불교 설화 등을 담고 있다. 한국 고대 신화와 민속 연구의 핵심 1차 자료로 여겨진다.
- 도화녀(桃花女).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죽은 진지왕의 혼령과 관계를 맺어 비형랑을 낳은 여성이다.
- 장활식, 「비형랑과 목랑신앙」, 『신라문화』 50집,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17, 181~183쪽.
- 벽귀신앙(辟鬼信仰). 귀신이나 악령을 막거나 쫓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신앙.
- 장활식, 앞의 논문, 183쪽.
- 장활식, 앞의 논문, 186쪽.
- 장활식, 앞의 논문, 181쪽.
- 박재인, 「드라마 <도깨비>와 고전서사의 관련성 및 그 스토리텔링의 의미」, 『인문과학』 65집, 충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7, 364~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