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야차
목적도 언어도 없이 재앙만 남기는 산중 귀물

요괴는 자연이나 인간 세계의 바깥에서 비롯된 힘이 기괴한 형태로 인격화된 존재다. 어떤 목적도 의미도 명확히 드러내지 않으며, 출몰의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이기도 하다.
백두산야차는 이 기준에 부합한다. 원한도 없고 인정의 욕망도 없으며, 살아있는 자에게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있고, 그 자리에서 재앙을 뿌린다. 지배적인 도덕과 언어 체계 안에 포획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백두산야차는 낯선 실재 그 자체다.
개요
백두산 깊은 산중에 출몰한다고 전해지는 요괴. 인간의 형상을 띠지 않으며, 마주친 자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와 재앙을 안긴다. 이야기 속에서 야차는 말을 걸지 않고, 신원(伸寃)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목적도 표명하지 않는다.[1] 조선 중기 이후 산간 지역을 무대로 한 야담류에 산도깨비, 산귀(山鬼), 산매(山魅) 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존재들과 계보를 같이 하며, 그중 가장 거칠고 비인격적인 형태로 알려진다.[2]
유래와 형성
야차(夜叉)라는 명칭은 본래 불교 설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을 해치는 악귀를 통칭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조선의 필기·야담류 전통 속에서 이 이름은 불교적 맥락을 상당 부분 탈각하고, 산악 지형에 서식하는 정체불명의 귀물을 지칭하는 말로 변용되었다. 백두산이라는 지명이 결합된 것은 그 지형의 극단성 때문이다. 인간의 거주 한계를 넘어선 고지대, 짙은 수림, 혹독한 기후 등이 인간의 언어 체계 바깥에 놓인 존재를 상상하기에 적합한 배경을 제공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한 조선 사회에서 귀신에 관한 설명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사회 공동체의 실패와 억압에서 비롯된 원귀·여귀의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상징적 맥락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귀물의 방향이었다. 백두산야차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그것은 성리학적 상징질서에서 볼 때 전적인 잉여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가적 지식인들은 대체로 이런 존재를 언급하지 않거나 경원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특징
비인격성과 비언어성
백두산야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소통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원귀나 여귀가 언어로 소통할 수 있고 인정의 욕망을 지닌 존재들인 데 반해, 야차는 그 어떤 언어적 교환도 시도하지 않는다. 목격자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은 형상의 기괴함과 접촉 이후 찾아오는 재앙뿐이다. 그 재앙이 왜 자신에게 떨어졌는지, 야차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언어성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체계 속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근본적인 이질성의 표현이다. 야차를 달래거나 설득하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멀리하고 조심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출몰 방식
야차는 인간이 사는 곳을 침범하지 않는다. 산사나 산중 고갯길처럼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의 경계 지점에 출몰한다. 이 점에서 야차는 경계적 존재다. 인간의 세계가 자연의 깊은 속으로 침범했을 때, 그 침범에 응답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응답조차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야차는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조선 중기 야담류에는 깊은 산중에서 무시무시한 형상의 존재를 마주친 사례가 여럿 기록되어 있으며,[3] 이 목격담들은 인간의 질서가 인정되지 않는 지형에서 주로 발생한다. 그것은 공포가 어떤 방식으로 기괴한 형상과 결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앙의 성격
야차가 가져오는 재앙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 귀물이 일으키는 재앙을 전통적으로 '동티'라 불렀는데, 이는 어떤 금기를 위반한 결과 발생하는 재앙이지만 그 금기가 금기여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야차의 재앙도 이와 같은 구조를 지닌다. 마주쳤다는 사실 자체가 재앙의 원인이 된다. 피해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도덕적 결함이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창작 포인트
백두산야차를 서사 안에서 활용할 때, 이 존재에게 목적이나 배경 서사를 부여하는 순간 그것은 야차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된다. 야차의 서사적 힘은 정확히 그 무목적성에서 온다.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야차가 악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야차는 특정한 것을 원하지도,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존재는 이승과 저승의 법도, 도덕과 인륜의 체계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지점을 형상화하는 데 적합하다. 그 어떤 화해도, 해원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 존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력감, 그것이 백두산야차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각주
- 강상순, 「조선시대 필기·야담류에 나타난 귀신의 세 유형과 그 역사적 변모」, 『우리어문연구』 38 (2010): 160.
- 유몽인, 『어우야담』, 신익철·이형대·조융희·노영미 역 (서울: 돌베개, 2006). 정백창이 산사에서 무시무시한 형상의 산도깨비를 만난 이야기 등 산중 귀물 관련 서술 다수 수록.
- 유몽인, 앞의 책. 성수침과 정백창이 각각 산중에서 만난 산도깨비 서술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