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의 시작이 궁금하다면,
재벌 3세 김주원(<시크릿가든>)이 어떻게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지 확인해보세요.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② — 이신, 자유를 꿈꾸다 정략결혼에 갇힌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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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헌군주제’라는 가짜 세계를 믿게 만드는 법
: 〈궁〉 유치한 대사 속에 숨겨진 정교한 캐릭터 목표와 계급 설계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을 보다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완이라는 캐릭터, 소개만 놓고 보면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빛나서도 안 되고 소리 내서도 안 되는 삶을 강요받던 둘째 왕자,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섭정을 떠맡은 남자. 국민 지지도는 압도적이고, 대비 측조차 대놓고 건드리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단단합니다. 거기다 변우석 배우님이 연기하는 비운의 왕자라니. 직전에 〈선재 업고 튀어〉를 좋아해서 대본집도 사고 더현대 팝업 전시까지 갔던 덕후로서, 이건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4회까지 본방 사수를 했지만, 20년 전의 황태자 이신만큼 구미가 당기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21세기 수양대군’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선입견 때문에 제가 벽을 친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저는 역사 덕후라서, 입헌군주제라는 컨셉을 IF라는 세계관을 통해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렇게 따지고 보니 자꾸 걸리는 게 생겼습니다. 이안대군이 ‘21세기 수양대군’이라는 별명, 설정상 대비 측이 의도적으로 흘린 악성 키워드라고 해도 황실이 왜 바로 반박하지 않는 건지.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인데 어째서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는 제 자신이 싫어 결국 시청을 그만두었습니다.
그 시간에 옛 드라마를 시청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참고로 〈궁〉은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궁〉이 인기 많았던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배우들의 비주얼,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과 공간 미술, 감미로운 OST까지. 근데 막상 다시 보니 헛웃음 짓게 만드는 포인트들이 꽤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봤을 때도 그랬어요. 우리 또래들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말들을 왜 고등학생인 여자 주인공이 하고 있는 건지, 만화책보다 더 유치한 대사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어이상실” “운 좋은 줄 아셔” “초절정 왕싸가지” “분위기 대략 므흣하네~” “좌우당간”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게 황태자와 일반 서민의 신분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계산된 장치라는 걸요. 사극에서 양반과 서민이 쓰는 언어가 다르듯, 인터넷 용어 같은 단어들을 일부러 여주인공 입에서 나오게 한 겁니다.
그러니 더 궁금해졌습니다. 이렇게 촌스러운 여자 주인공과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신이라는 캐릭터, 어떻게 설계되어 있을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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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 다루는 것 ]
첫 화부터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남주
왜 자꾸 채경의 신경을 건드릴까?
관심 없다면서 왜 자꾸 먼저 챙기냐 — 왕싸가지가 매력적인 이유
여주의 눈으로 남주를 보게 되는 구조
두 번째 후회남주 이신 : 캐릭터 목표 분석
1화 — 왕싸가지 황태자, 첫인상 설계하는 법
고등학생 남자애가 멋있어 보일 포인트가 딱히 있나요? 딱히 없습니다. 근데 이신은 황태자입니다. 싸가지 없어도 매력적으로 읽히는 게 가능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능력이 신분으로 이미 증명된 남자, 그 신분을 어떻게 쓸지 아는 남자.

이신은 황태자답게 국민 스타입니다. 리무진이 교문 앞에 서는 순간 학생들이 몰려듭니다. 익위사가 에워싸도 환호성은 멈추지 않습니다. 학교 건물 유리창은 방탄으로 교체됐고, 팬클럽이 교문 밖을 지킵니다. 황실 앨범 한 귀퉁이가 찢어졌다는 이유로 학생이 목 졸림을 당합니다. 이신이 등장하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이 남자의 존재감을 먼저 쌓아 올립니다.
거기다 이신은 1화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능동적으로 움직입니다.
익위사 축소를 학교 등교의 조건으로 협상해냅니다. 효린에게 청혼하고 거절당합니다. 그걸 몰래 들은 채경을 쫓아가 협박합니다. 그 타이밍에 파파라치가 들이닥치자, 이신은 채경을 먼저 골목 옆으로 밀어 숨깁니다. 자기가 먼저 나갈 테니 조금 있다 나오라고도 하고요.

활궁 씬에서는 이 캐릭터의 목표가 대사로 직접 드러납니다. 공내관이 채경의 집안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돌려 말하자, 이신은 화살을 날리면서 답합니다.
“21세기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는 발상이 웃기지 않나요? 격에 맞지 않는 그 아이가 궁에 들어오면, 재밌는 일 많아질지도 모르잖습니까.”
이 한 줄 안에 이신이 가진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계급에 대한 냉소, 궁이라는 시스템을 비틀려는 욕구, 그리고 그 욕구를 ‘재밌겠다’는 말로 포장하는 방식까지.
공식 소개에서 이신의 상징어는 ‘자유’입니다. 그렇게 자유를 꿈꾸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궁에 가둘 수 없어서 모르는 애와의 정략결혼을 선택한 19살이라는 것. 황태자라는 자신의 지위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2화 — 이신이 반응을 기다리는 유일한 상대
채경이 처음으로 궁 안으로 들어오는 2화. 시청자는 채경의 눈으로 이 공간을 처음 봅니다. 그런데 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신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신이 어디로 움직이든 익위사들이 따라붙습니다. 한두 명이 아닙니다. 밥을 먹어도, 복도를 걸어도, 수련을 해도 항상 그 인원들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 이 씬들을 통해 남주가 왜 그렇게 자유를 원하는지를, 왜 효린을 이 공간 안으로 들이지 못했는지 납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처럼 살게 두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그 익위사들 너머로, 이신 곁에 진짜 의미로 있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보입니다. 황제와 황후 앞에서는 이어폰을 낍니다. 황태후 앞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궁 안에서 마음을 열어둘 사람이 없는 남자입니다.
제가 세어보니 1회부터 쭉, 채경에게만큼은 이신이 먼저 말을 걸고 있더라고요. 채경의 반응을 기대하고 기다려요. 효린이 공연 때문에 연락이 닿지 않으니, 그 빈자리를 채경이 채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황후 면담을 마친 채경에게 다가가 ‘니가 평범하고 무난하고 재밌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고 말한다거나, 일부러 학생들이 보고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효린이 아니라 채경을 선택한 이유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란 식으로 괜히 신경을 건드리는 식입니다. 발길질을 시도하다 넘어져도 일으켜주지 않고 내려다보며 웃습니다. 그러니 여주가 궁에 들어오면 남주의 심경 변화에 많은 게 달라질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기더라고요.
3화 — 왕싸가지도 눈치는 봅니다
3화에서 이신이 채경과 무관하게 등장하는 씬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남자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하는 게 생기면 타이밍을 골라 밀어붙이고, 밀리는 순간 판 자체를 뒤집어버리는 스타일이거든요. 황태후, 황제, 황후가 모인 자리에서 이신은 창덕궁 이전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하고, 황후가 ‘수리 중’이라며 얼버무리자 결혼 전에 분명히 약속했다고 정확하게 짚어낼 줄 압니다. 황후가 반박하자 채경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먼저 떠납니다.

이신은 자신처럼 억지로 정략혼인을 하게 된 채경이 불쌍했는지, 그녀가 공부하는 공간에 위문을 옵니다. 친구가 챙겨준 사탕과 초콜릿 봉지를 들고서, “율이가 보낸 거야”라고 툭 내밀지만, 직접 들고 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참 귀여워서 ‘풋..’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정말로 죽기 직전에, 뭐 못 견뎌서 죽을 것 같기 직전에만 말해. 그때는 해줄 테니까.”
관심 없는 채경의 표정을 보고, 이신이 눈치 보며 먼저 꺼낸 말입니다. 후반부에 채경이 이 ‘이혼 약속’을 꺼내드는 순간의 충격이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미리 판을 까는 거죠.
합궁례 자리에서 둘 다 잠이 들고 최상궁이 깨우러 오자, 이신이 손짓으로 막습니다. 채경을 더 재우겠다는 거죠. 채경이 잠에서 깨자, 먼저 손을 내밉니다.

“누구를 챙긴다거나, 입장 바꿔 생각한다거나, 그런 건 내 체질이 아니거든. 친구로서 고민 상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말로만 그래요. 이미 세 번을 넘게 채경에게 먼저 다가갔습니다. 왕싸가지인 척하면서 행동은 자꾸 딴소리를 하는 이 남자에게, 어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나요.
4화 — 남자주인공을 훔쳐보는 구조
4화는 채경이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신분이 바뀐 여주에 비해, 남주는 그냥 배경처럼 느껴지더라고요. ‘1~3화처럼 먼저 판을 짜고 밀어붙이는 모습이 왜 없을까? 효린이 귀국해서일까?’ 생각해봤는데... 한 네 번쯤 다시 보니, 의도적으로 채경의 눈으로 이신을 보게 만들도록 씬이 배치되어 있더라고요.

이신과 채경은 부부가 됐습니다. 같은 리무진을 타고, 같은 학교에 가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습니다. 채경은 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조금 알아버린 상황입니다. 미운 말만 골라 하면서도 위문 오고, 손도 내밀었으니까요. 어떤 애인지 궁금하고 친해지고 싶은데, 리무진에서는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봅니다. 학교에서는 자기 친구들이랑만 놀고, 궁에 돌아와서는 효린과 통화하느라 정신없습니다. 부부가 되고서부터 오히려 더 관심이 없어 보이니, 서운함이 증폭되죠.

궁 안에서 돈과 공간으로 자신의 자리가 생겼지만, 조그만 방에서 가족들과 북적이던 때보다 더 외로워 보입니다. 공간이 커질수록 홀로 있는 채경이 더 돋보이고요. 그 외로움이 쌓이니, 이제 남의 외로움도 보입니다. 곰인형을 끌어안은 채 슬픈 표정으로 서 있는 이신을 보며, 채경이 처음으로 묻습니다. 쟤는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냐고.

지금 보니 조금 멋쩍네요. 곰인형을 안고 있는 남자 주인공. 문득 남주가 들고 있던 테디베어 구경하겠다고, 가족 제주도 여행 일정에 테디베어 박물관을 넣었거든요. 어렸을 때의 저를 떠올리니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식 홈페이지에서 다룬 이신 캐릭터 소개글을 중심으로 각 화를 뜯어 정리해봤습니다. 다음은 이 남자가 각 씬마다 어떤 목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궁금해서 파본, 제 맘대로 파본 분석표입니다.
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이신’
욕망 | 인물이 간절히 원하는 것 |
위기 | 예상치 못하게 닥친 사건 |
갈등 |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외적 충돌 |
감정 |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변해가는 마음의 결 |
목표1 — 어른들이 정한 운명에서 탈출하기 (But 여친에게 고백 거절당함)
[1화]
익위사 교문 밖 대기 명령 – 감시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사수하려는 발악 (욕망)
효린에게 청혼 – 국혼 거부 및 자의적 선택권 행사 (욕망)
효린의 거절과 유학 선언 – 유일한 탈출구 상실 및 고립 (위기)
파파라치 피해 채경과 은신 – 공인된 삶에 대한 신물과 경계 (갈등)
[2화]
율에게 “공짜는 아니다” – 운명 수용의 대가로 자유를 거래하려는 계산 (욕망)
연락 안 되는 효린 회상 – 유일한 탈출구 상실에 따른 고립감 (감정)
효린에게 반복 전화 시도 – 거절당했음에도 끊지 못한 미련과 초조 (위기)
뒤쫓는 익위사 24시간 목격 – 감시되는 현실에 대한 자각 (갈등)
[3화]
율의 위로·조언 무시 – 타인을 챙기는 감정 소모 거부 (감정)
“나중에 이혼해줄게” – 현재의 결속을 부정하며 탈출 약속 (욕망)
[4화]
효린의 “너 후회할 거야” 경고 –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상실감 실감 (위기)
효린의 농담에 미소 – 궁 밖, 마음을 주고받은 유일한 상대 앞에서만 무장 해제 (감정)
채경의 귀가 요청 거절 – 사적 감정보다 정해진 스케줄 우선 (위기)
효린의 모임 제안 수락 – 궁 밖으로 나갈 명분 확보 (욕망)
목표2 — 황실은 비웃되 자존심은 고수 (But 채경의 하찮은 도발에 발끈)
[1화]
더러워진 실내화 유기 – 자신의 정갈한 질서를 오염시킨 변수(채경) 차단 (위기)
채경의 입 막은 손가락 닦기 – 타인과의 접촉 혐오 및 선민의식 (감정)
채경에게 신변 경고 – 자신의 치부를 목격한 존재에 대한 공격 (갈등)
황제 앞에서 이어폰 끼기 – 부모의 훈계 차단 및 무언의 반항 (감정)
황제에게 “진정한 친구 있냐” 질문 – 황실의 위선과 부친의 가치관 조롱 (갈등)
[2화]
채경에게 “명랑만화 주인공” – 상대를 장난감 취급하며 우월감 확인 (욕망)
채경의 굴욕 사진 보며 폭소 – 격 떨어지는 상대의 실수를 유희로 소비 (감정)
채경에게 “품질이 별로” 독설 – 급 안 맞는 신부에 대한 선민의식과 불쾌 (갈등)
“체육복 당장 벗어” 윽박 – 자신의 세계를 오염시키는 서민 취향 거부 (위기)
채경의 발길질에 실소 – 상식 밖 행동을 보며 우월적 위치 재확인 (감정)
[3화]
공내관 질문에 비아냥 – 황실의 과도한 사생활 침해 조롱 (감정)
군중 향해 손 흔들기 – 대외적으로 철저히 관리된 황태자의 가짜 품격 (욕망)
가채 사건 방관 – 파트너의 실수를 남 일처럼 구경하며 거리 두기 (위기)
채경에게 “순대” 비하 – 격 떨어지는 상대를 깎아내려 우월감 사수 (갈등)
손등 물리고 버럭 – 예상을 벗어난 무식한 공격에 품격 붕괴 (위기)
[4화]
채경의 재산 자랑 비난 – 돈에 들뜬 서민적 모습 경멸 (감정)
채경의 브이 포즈 단속 – 황실 품격 깎는 채경에 대한 불쾌함 (위기)
‘첫날밤 7%’ 사건 언급 – 채경에게 물린 치부를 농담으로 방어 (갈등)
채경의 ‘왕자병’ 도발 무시 – 하찮은 놀림에 반응 안 하며 우위 고수 (감정)
목표3 — 지루한 궁 생활을 망가뜨리고 싶음 (But 자포자기적 국혼 수용)
[1화]
리무진 속 스케줄 확인 – – 박제된 일상에 대한 극심한 권태 (감정)
공내관에게 “재밌는 일 생길지 압니까” – – 국혼을 황실 조롱을 위한 유희로 변주 (욕망)
채경의 촌스러운 사진 확인 – – 격 떨어지는 태자비로 궁의 품격이 실추되길 기대 (욕망)
활 쏘며 국혼 수용 – – 도망칠 수 없다면 판이라도 흔들어보려는 의지 (욕망)
[2화]
당겨진 혼례 날짜 수용 – – 도망칠 수 없는 삶에 대한 무기력한 체념 (위기)
문화재 문건 보며 한숨 – – 황태자의 막중한 책임에 대한 압박과 환멸 (갈등)
율에게 “어르신들 고생 보고 싶다” – – 채경을 이용해 황실을 골탕 먹이려는 심산 (욕망)
황후의 율 경계 조언 무시 – – 궁 내부 권력 싸움에 대한 염증과 저항 (갈등)
[3화]
임헌초계 명령 수락 – – 어른들의 세계에 편입되는 가식적 절차 수행 (갈등)
운현궁 사탕 전달 – – 율의 권유에 따른 형식적 위로 방문 (욕망)
‘합방 왜 미루냐’ 도발 – – 보수적인 궁중 예법을 흔드는 가학적 유희 (욕망)
“돌봐주는 건 내 체질 아냐” – – 관계의 의무를 거부하며 최소한의 자아 사수 (갈등)
[4화]
창덕궁 이전 불이행에 반발 – – 어른들의 기만에 대한 공격적 태도 (갈등)
채경 손목 잡아 끌고 퇴장 – – 무례한 행동으로 황실 질서 파괴 (욕망)
‘결혼은 다 연기였다’ 선언 – – 국혼을 어른들 골탕 먹일 도구로 이용 (욕망)
황제와 영화 관람 중 채경 방관 – – 귀찮은 의무를 해치우는 무심한 태도 (감정)
곰인형 안고 슬픈 표정 – – 화려한 감옥 안에서 느끼는 근본적 허무 (위기)
세계관 설계가 탄탄하다는 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그 세계의 법도를 납득시킨다는 뜻입니다. 주인공들을 감시하는 수많은 시선과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배치해, 시청자가 이 가짜 세계를 실제 현실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죠.
가장 높은 어른인 황태후는 혼자 있을 때 드라마를 보며 소탈하게 웃다가도,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만 들리면 찰나의 순간에 인격 자체를 교체하듯 엄격한 품위를 갖춰 앉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공간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곳임을 증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채경의 교육을 담당하는 최상궁은 채경이 실수를 저지를 때 그녀를 직접 혼내지 않습니다. 대신 채경의 담당 나인들을 불러 무릎을 꿇리고 엄히 문책하죠. 나의 실수가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이 잔인한 연좌제는, 채경에게 이곳이 더 이상 명랑만화 같은 놀이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가진 신분의 무게가 곧 타인을 짓누르는 권력이자 책임이라는 것을 시청자도 함께 체감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은 공내관 같은 조연들의 행동을 통해서도 더욱 구체화됩니다. 나인들이 채경에 대해 가벼운 험담을 나누다 공내관에게 즉시 적발되어 강한 질책을 듣는 장면은, 궁 안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을 누구보다 영리하게 이용하는 인물이 남자주인공 이신입니다.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을수록 그는 철저하게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채경만 들을 수 있는 낮은 목소리로 협박을 건넵니다. 채경은 이신의 실체를 알면서도 이를 발설하는 순간 닥쳐올 사회적 파장을 알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채경이 느끼는 답답함은 성격차이를 넘어 말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계급 사회의 압박에서 오는 셈입니다.
24부작이었던 〈궁〉과 달리, 12부작의 빠른 전개를 선택한 <21세기 대군부인>에서는 이 과정이 사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건의 속도감을 위해 조연들의 반응과 황실의 규율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후순위로 미룬 결과, 시청자가 그 가짜 세계를 실제 현실로 받아들일 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음 궁금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 이완이 이신만큼 당기지 않았던 이유도 이제 보입니다. 이완은 처음부터 너무 가진 게 많습니다. 국민 지지도 압도적, 대비도 못 건드리는 위치, 계약결혼 예정인 희주를 학창시절부터 눈여겨봤습니다. 결핍이 없는 건 아닙니다. 과거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데 어린 조카를 위해 섭정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 힘든 이유가 명확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가 간절히 원하는 게 뭔지가 잘 안 잡힙니다. 결핍은 있는데 욕망이 선명하지 않으니, 무너지는 순간을 기다리게 되질 않는 거죠.
반면 이신은 처음부터 불리한 출발을 합니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장면을, 하필 안면도 없는 여자애한테 들키고, 그 애와 강제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19살에. 그 ‘손해 보는 출발점’이 이 캐릭터를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힘이었던 것 같네요.
거기다 이안대군과 희주가 현재 시점에서 부딪히는 횟수 자체가 적었습니다.
예를 들어 〈궁〉은 1화에서만 신이 채경의 실내화를 걷어차고 → 채경이 자신의 고백 현장을 엿들은 걸 발각하고 → 골목으로 불러내 경고하고 → 정략결혼 상대가 채경이라는 걸 알고 충격받는 등, 네 번이나 두 사람이 부딪히며 감정을 쌓아갑니다.
〈21세기 대군부인〉은 국왕의 탄일연에서 마주친 것 외에는 없습니다. 과거 두 주인공이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으로 반전을 보여주니, 흐름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도 웹드라마를 쓸 때 그렇게 해온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장편 드라마에서는 과거 서사보다 현재 시점에서 감정을 쌓아야 몰입력이 높아진다는 걸 배우게 되었달까요...
다음 편에서 제가 뜯어볼 남주는 굉장히 현실적인 스타일입니다.
요즘 〈유미의 세포들 3〉를 보면서 ‘수많은 전남친과 나의 연애의 역사들’이 떠오른다면, 10년 전엔 그 역할을 〈연애의 발견〉이 했다고 믿거든요. 풋풋한 고딩들과의 연애와는 결이 다른, 다 컸는데도 사랑 앞에서 한없이 찌질해지는 어른의 연애. 왠지 이번 남주는 보면서 설레기보단 짜증이 밀려올 것 같습니다. 다만, 저의 최애캐 중에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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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깡 작가 (📧)
0원 벌고도 드라마 앓느라 밤새는, 가성비 최악의 프리랜서 작가.
드라마가 밥 먹여주냐고요? 아니요, 제 밥값이 드라마(OTT구독료)한테 갑니다.
그래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웹드라마·웹예능 기획, 전자책 대필 등 글 쓰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제가 쓴 작품에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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