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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사랑한 이야기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⑩— 선우완, 친일도 독립도 거부한 모던보이가 신념뿐인 여자에게 무너진 남자

〈경성스캔들〉 선우완 캐릭터 분석. 친일도 독립도 거부한 채 신념 없이 살기로 한 1930년대 경성의 데카당스 모던보이가, 신념뿐인 여자 나여경을 만나 가치관이 흔들리고 독립투사로 향하는 성장을 낑깡 작가가 1~4화 단위로 뜯어봅니다.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시리즈 완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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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a Team
Jun 29, 2026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⑩— 선우완, 친일도 독립도 거부한 모던보이가 신념뿐인 여자에게 무너진 남자
Contents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실은 질풍노도 중이었습니다1회 — 경성 여자들을 10분이면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2회 — 개나 소나 다 독립투사군…3회 — 고무신 하나 얻으려다 경성 최고의 스캔들이 된다고?4회 — 밥 줄 생각 없는 주인한테 꼬리치는 멍멍이 노릇 관두겠다고!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선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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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화에서는 〈내 이름은 김삼순〉의 남주를 다뤘어요!

▶️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⑨— 현진헌, 버럭대는 레스토랑 사장인데 첫사랑 못 잊는 후회남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실은 질풍노도 중이었습니다

: 〈경성스캔들〉 유흥과 내기로 시작한 남자가 독립투사가 되기까지

좋아하는 드라마 때문에 어디까지 덕질을 해본 적 있나요?

OST 앨범을 사고, 촬영장이었던 장소를 방문하고, 연예인에게 팬레터를 써보고, 팬뮤비를 만들어보고… 저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해봤는데, 제일 스케일 크게 영향력을 일으킨 순간을 떠올려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S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을 너무 좋아해서 쥬니어네이버 클럽을 만들었고, 종영 이후엔 모든 드라마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해 울트라마린 레벨까지 키웠습니다. ‘장미가족의 태그교실’로 태그 쓰는 법을 배우고, 동꼬도 만들던 그 시절. 그 첫 덕질을 하게 만든 작품을 써주신 분이 바로 진수완 작가님이셨습니다.

2004년 무렵의 쥬니어네이버 클럽 갈무리
2004년 무렵의 쥬니어네이버 클럽 갈무리

7차 교육과정을 겪으신 분들이라면 아마 이 분의 작품을 한 번은 보셨을 겁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학교 2〉의 ‘어느 날 심장이 말했다’ 에피소드가 대본으로 실려 있었거든요.

문제집 〈우공비 중학 국어〉 답안지
문제집 〈우공비 중학 국어〉 답안지

초라하고 무능해 보이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자라온 아들이, 어느 날에서야 그 외면이 실은 사랑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 이후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이 질문이 〈학교 2〉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걸요. 아버지를 못 미더워하는 아들, 그리고 그 아버지를 끝내 용서하지 못하거나, 오해가 풀리며 비로소 이해하게 되거나.. 작가님은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파고들었습니다. 이번 회차에 분석하는 선우완도 그 아들들 중 하나입니다.

〈경성스캔들〉을 처음 본 건 2008년이었습니다. 2007년 방영이 끝나고 1년쯤 지났을 때인가, 친구가 권해줬어요. 시대 배경 때문에 진입 장벽이 있을 것 같아 공부하려고 보려고 미루던 중이었는데, “그런 거 생각 안 해도 돼. 등장인물들이 무지 귀엽고 웃겨서 어렵지 않아.”라던 친구의 말을 믿고 주말 이틀 동안 16부를 단번에 다 봤습니다. 500원인가 700원인가 하는 KBS 공홈에 다시보기 요금을 내면서요.

드라마 〈경성스캔들〉 16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16회 중

저한테 드라마는 일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이랑 함께 보고, 그 장면을 두고 이야기 나눈 적이 많거든요. 자연스레 가족들과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에 더 관심이 갔고, 즐겁게 볼 수 있으면서도 뭔가 남는 이야기에 끌렸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는 기본이되 그 안에 성장이 있는 작품을 찾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드라마를 보는 방식이자, 제가 드라마를 쓰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진수완 작가님 작품을 보고 또 보게 되는 이유를 오랫동안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웠는데, 이번 편을 쓰며 조금 확신이 생겼습니다. 작가님은 모든 작품에 성장이라는 장르를 심어두는 분이거든요. 그 안에서 인물이 살아가는 가치관 전체가 흔들리고 다시 세워지는 이야기. 그래서 실제로 제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후회남주]라는 키워드 안에서 성장을 가장 깊게 다룬 〈경성스캔들〉을 이 시리즈의 마지막 편으로 골랐습니다.

💡

[ 이 글에서 다루는 것 ]

  • 독립투사가 정의인 시대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한 남자

  • 신념을 갖지 않기로 한 남자 앞에 신념뿐인 여자가 나타난다면

  • 나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 누군가를 위한 행동으로 연결될 때

  • 내 가치관을 흔들어놓는 여주를 만난다면

  • 열 번째 후회남주 : 선우완 캐릭터 목표 분석

1회 — 경성 여자들을 10분이면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선우완은 부산역 플랫폼에서 연인과 헤어지는 장면으로 등장합니다. 그것도 새벽안개가 다 걷히지 않은 시각입니다. 독립운동 때문에 사랑을 놓치기로 했다는 말에 감동한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남자는 모질게 외면하며 기차에 오릅니다. 그리고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 씨익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습니다.

“조국 해방은 무슨. 너한테 해방되는 게 먼저지.”

투사처럼 보이려다 아니지롱~ 하고 뒤집어버리는 구조라니. 어랏, 이 드라마.. 독립운동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경성스캔들〉은 정면으로 배반하는 씬이 1회에 여럿 배치됩니다. 현대극에서 재벌남주라면 동경의 대상이잖아요. 돈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선택지도 많은 사람. 그런데 1930년대 경성의 재벌남주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1930년대 경성 지식인 청년의 길은 세 가지였습니다. 친일세력에 편승하거나,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되거나. 선우완의 아버지는 총독부 줄을 대며 집안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재벌이라는 배경이 독이 되는 시대, 가진 게 많을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서 친일의 줄을 놓을 수 없는 구조 안에 태어난 겁니다. 선우완은 셋 다 거부한 데카당스 모던보이입니다. 데카당스는 세상이 제시하는 모든 선택지를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진지하게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진지하게 무언가를 잃지 않아도 되니까요.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독립투사가 정의인 시대에, 친일파 집안 아들이 선택한 건 모든 사람을 비웃는 일이었습니다. 친일도, 혁명도, 독립운동도.. 어느 쪽을 선택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조롱하는 잡지, ‘월간 지라시’의 객원기자. 누군가의 상처를 알기에 비웃을 수 있었던 현진헌(*내 이름은 김삼순 남자주인공)보다 선우완의 비웃음은 스케일이 다릅니다. 남주의 첫 장면에서 그 인물의 전부를 드러내며 궁금증을 일으켜야 한다는 걸, 이 드라마를 분석하면서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1화에서 남주인 완과 여주인 여경은 총 세 번 엮입니다.

  • 첫 번째 : 부산역 가방 소동 → 경찰서 방문 → 여경에게 뺨 맞음 → 동네방네 소문남

  • 두 번째 : 카페에서 여경 대화 엿듣다 기삿거리 포착 → 존경받는 지식인 스캔들 기사로 우스꽝스럽게 만듦 → 지라시 잡지 완판 자축 파티

  • 세 번째 : 파티에서 동료들과의 내기 수락 → 잠든 사이 여경이 뛰어들어 총구를 겨눔

경성의 여자들을 10분이면 다 꼬실 수 있다고 말하는 선우완은 이번에 자신이 꼬셔야 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내기를 수락했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채였거든요. 그 내기의 대상인 여자주인공의 별명은 조마자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여자!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겉모습이 딱 그 별명 그대로라, 누가 봐도 독립운동을 할 것 같은 똘똘한 여인입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1회 중

“만약에 실패하면 조선의 해방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는 독립투사가 되지!”

호탕하게 웃으며 내기를 수락하던 그 말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될 줄은 아마 이땐 몰랐겠죠. 이렇게 1화에서 내내 아무것도 진지하게 대하지 않으며 유흥과 장난 사이를 오가던 선우완이 딱 한 번, 금이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녁 식탁, 계모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꺼내는 대목입니다. 얼굴이 굳더니 아버지를 향해 이수현이라는 이름을 던집니다. 물컵이 날아와 등 뒤 벽에 부딪혀 와장창 박살납니다. 아직 이수현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 그가 선우완을 포함해 이 집안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인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상태입니다.

2회 — 개나 소나 다 독립투사군…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선우완의 곁에는 경성을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라시 기자들과 기생들, 재즈가 흐르는 카페와 댄스홀을 누비는 모던 걸과 모던 보이들. 나라 잃은 암울한 시대라지만, 그 반대편에서 유흥과 사교와 스캔들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사람들이 존재했습니다. 선우완은 그중 으뜸입니다. 지라시 편집장 탁구는 왕년에 의열단이었다며 무용담을 늘어놓고, 기생들은 경성의 소문들을 이야기하느라 바쁘고, 선우완의 아버지와 옛 친구 수현은 총독부에서 활약하느라 바쁩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사실 어렸을 적 남주가 속해 있던 세계는,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2화 과거회상 중 다섯 명이 함께 앉은 장면이 나오는데요. 마루 위에 아버지와 민, 완 형제가 앉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수현과 수현의 아버지가 앉아 있습니다. 1930년대 신분제 사회에서 앉는 거리가 곧 관계의 거리였던 시절입니다. 그 거리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풀샷인데, 그 안에서 유독 완만 어느 쪽과도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자리에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은 세계에 있지는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독립운동을 하던 형 민, 민족주의가 뭔지 가르쳐주던 친구 수현. 어린 시절 그들과 함께였던 완은… 현재의 나여경 쪽에 훨씬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형이 죽기 전까지는요. 형을 밀고한 사람이 수현이라는 말에 완은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신념을 가진 사람이 그 신념을 배반하는 걸 눈앞에서 본 선우완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애초에 신념 같은 건 갖지 말자!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2회 중

나여경의 곁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어떤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학에서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 독립운동을 하다 지쳐 포기하려는 사람들, 살기 위해 친일을 선택한 사람들까지. 여경은 그 사람들 가장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야학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순사에게 쫓기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약자들 곁에 서 있는 여자. 10년 전 형 민이 하던 것들과 닮아있습니다. 죽은 형의 모습으로, 마음속에서 이미 지워버린 친구의 모습으로, 나여경이라는 사람이 자꾸 눈앞에 나타나는 겁니다. 선우완이 스스로 닫아버린 세계가 그 여자의 형태로 계속 문을 두드리니, 마음이 복잡했을 겁니다.

3회 — 고무신 하나 얻으려다 경성 최고의 스캔들이 된다고?

3화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브 남녀주인공의 서사가 워낙 깊게 열리는 회차라 남여주에 대해 분석할 거리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3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3회 중

3화에서 완은 여경을 꼬시기 위해 세 번 움직입니다. 저도 어떤 규칙에 맞춰서 장면을 배열하는 편인데요. 특히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는 거절을 당하는 씬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씬의 목표 없이 그런 공식만 적용해서 쓰면 노잼 씬들이 탄생한답니다. 주의하세요..!

첫 번째는 서점 앞에서 시집을 읽는 척 기다리는 작업 모드였고, 두 번째는 여경의 어머니인 최학희에게 먼저 파고들어 한복 칫수를 재는 우회로였고, 세 번째는 필성이라는 아이 때문에 얼떨결에 권투 시합에 출전하게 됩니다. 갈수록 선우완의 의도가 흐릿해집니다. 분명 내기를 위해서였는데, 어느 순간 뭘 위해서인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감정이 가장 깊어지는 법이잖아요. 시합에서 4등을 해야 아이가 원하는 고무신을 따 줄 수 있는데, 하다 보니 승부근성이 발동해서 2등을 해버립니다. 신이 나 환호하지만, 고무신이 아닌 솥단지를 얻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타박을 받는 걸로 귀결됩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권투 시합 씬은 이 드라마 제목과 연결되는 장면이더라고요. 〈경성스캔들〉. 경성에서 조선의 마지막 여자로 유명한 조마자와, 다른 쪽으로 유명한 모던보이가 사람 많은 행사장에서 함께 했으니, 지라시 기자들이 달려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합을 끝내고 여경이 완에게 건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그 아이한테 세상 전부를 갖게 해주셨어요.”

선우완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어떻게 이용할까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버지도, 계모도, 지라시팀도. 결과는 늘 돈이거나 관계거나 웃음이었습니다. 그들과 여경은 달랐습니다. 선우완 본인도 몰랐던 의미를 찾아서 돌려줬습니다. 완 입장에서는 늘 해오던 대로 온몸으로 열심히 뛰었을 뿐인데, 그 안에서 누군가가 먼저 가치를 발견한 겁니다. 신념 없이 행동한 일이 의미 있게 쓰였다는 감각. 어랏? 하고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순간… 사람은 이렇게 누군가의 반응에 취약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공모전 준비로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이 에세이 작성에 쏟으면서, 막막하고 바보 같은 일인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한 번, 글을 읽고 어떤 지점에서 도움이 됐다는 반응을 받거나 저 때문에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었단 말을 들으면 자려고 누웠다가도 자세를 고쳐잡고 한글 파일을 열어 작성하곤 했습니다. 드라마 속 여자 캐릭터들을 러브라인이 아닌 직업과 신념으로 재편집한 팬뮤비를 만들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댓글과 조회수 반응이 오자 매주 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주말을 쏟았습니다. 아무런 거창한 의도 없이 만든 영상인데 “이런 의도로 만드신 거죠?”라는 칭찬댓글이 달리면, 괜히 뿌듯해서 그 감각을 또 경험하고 싶어졌습니다. 어느 순간 의도를 가지고 영상을 편집하고, 내 의도를 알아주는 댓글들을 기다리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다 JTBC에서 공식 크로스 뮤비 제안(여러 드라마를 엮는 것)이 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마 완도 지금 막 그 감각을 알아가는 중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3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3회 중

3화 엔딩에서 선우완은 난생처음 자신의 집안 배경을 누군가를 위해 꺼냅니다. 여경이 종로서로 연행되었거든요. 송주가 “백마 탄 왕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부추기고, 근덕이 “팔 하나 못 쓰게 될 수도 있다”고 겁을 주고 나서야 나섰지만… 저는 앞에 권투씬이 있었기 때문에 여경을 구하러 가는 행동들이 납득이 된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 연민이랄까 사랑이랄까 그런 감정보다는.. 내가 가진 것으로 선의를 베풀었던 묘한 성취감을 느끼고 싶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감정을 일으킨 사람이 여경이니까요.

4회 — 밥 줄 생각 없는 주인한테 꼬리치는 멍멍이 노릇 관두겠다고!

로맨틱 코미디를 오래 보다 보면 알게 됩니다. 4화쯤에는 꼭 누군가 혼자 설레기 시작한다는 걸. 근데 이 작품 속 두 주인공은 4회까지 여태껏 서로에 대한 호감조차 쌓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완은 여경을 꼬시려는 마음을 그만두려고 합니다. 생각보다 이 사람의 신념이 너무 단단해서, 꼬시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졌거든요.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여경은 이불 속에 누워 오늘의 일을 곱씹으며, 1화부터 4화까지 그동안 완이 대가 없이 자신을 도와온 장면들을 떠올립니다. 포리스 가제트 사건, 명빈관 수색, 변장 에스코트, 권투 시합, 알리바이 증언. “그르네... 대가 없이 많이 도와주긴 했네…” 그러다 이불을 확 뒤집어쓰며 잊어내려고 합니다. 다음날 완이 다시 나타납니다. 지라시팀이 권투 시합에서 완과 여경이 함께 기뻐하는 장면을 스캔들 기사로 만들어버렸거든요. 완은 그 기사를 여경이 보기 전에 막으려고 또다시 그녀를 찾습니다.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드라마 〈경성스캔들〉 4회 중

여경의 문맹자 봉사 자리까지 따라가 지켜보는데,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위한 탄원서를 써달라는 부탁입니다. 까막눈이라 혼자는 쓸 수 없다는데… 완은 만년필을 뽑아들며 “제가 이래 뵈도 특종 전문 기잡니다”라고 웃습니다. 그리고 능숙하고 정갈한 필체로 탄원서를 써내려갑니다. 1화부터 지금까지 선우완이 움직인 건 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탄원서를 다 쓰고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편지를 읽는 여경을 바라보다 시선이 붙들립니다. 호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르고, 설렘이라고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여경을 떠올리면 귀찮고, 짜증스럽고, 신경 쓰이고, 왜 자꾸 생각나는지 모르겠는 그런 감정들.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서 사랑이 되는 거겠죠. 어떤 가치관이 한두 가지 사건으로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잖아요. 몇 달을, 때로는 몇 년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4화의 선우완은 아직 그 과정 한가운데 있습니다. 진수완 작가님은 언제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대한 설정이 매우 탄탄합니다. 주연을 포함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쫓아 움직입니다. 그렇다보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아주 조금 느릴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2배속 3배속으로 보는 세상에서는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겠죠.

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선우완’

욕망

인물이 간절히 원하는 것

위기

예상치 못하게 닥친 사건

갈등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외적 충돌

감정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변해가는 마음의 결

목표1 — 친일도 혁명도 아닌 유흥을 선택하고 그 안에 머물려 함 (but 술김에 뱉은 독립투사 발언이 발목을 잡아버림)

[1화]

  • 투사 행세로 여자를 부산역에서 떠나보내고 기차에 오르자마자 씨익 웃으며 돌아섬 (욕망)

  • 기차 안에서 여자들 시선을 즐기며 여유롭게 책을 펼쳐 듦 (욕망)

  • 경성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여자들을 발견하고 낮은 포복으로 숨음 (갈등)

  • 여자들에게 들켜 경성 시내를 내달리다 집사 차를 빼앗아 몰고 탈출함 (갈등)

  • 가방 문제로 지라시팀과 대책을 고민하다 집사가 몰래 경찰서에 신고해버림 (위기)

  • 집 앞에서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불 밝힌 저택을 한참 바라봄 (감정)

  • 아버지의 무시와 계모의 핀잔 속에서 지라시 장기근속으로 맞받아치며 식탁을 뜸 (갈등)

  • 명빈관에서 여자한테 맞았다는 소문에 움찔하고 영랑에게 뇌물을 쥐여주며 방을 부탁함 (감정)

  • 송주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댄스홀·스캔들 취재 등 유흥거리를 논하다 재밌는 일을 만들어주겠다며 자리를 나섬 (욕망)

  • 지라시 팀원들과의 내기, 실패 시 독립투사가 되겠다고 호탕하게 웃으며 선언해버림 (위기)

  • 만취한 채 해화당으로 당장 가겠다고 외치며 세기와 왕골에게 끌려감 (감정)

[2화]

  • 수현 앞에서 ‘총독부 나으리’를 짐짓 강조하며 여경을 숨겨주고 태연히 돌려보냄 (욕망)

  • 여경을 집까지 에스코트하며 “개나 소나 다 독립투사군…” 혼잣말을 내뱉음 (감정)

  • 허영화가 찾아오자 성가신 표정으로 따라나가 계모의 총독부 입성 권유를 잘라냄 (갈등)

  • 릿샤에서 사치코를 능숙하게 구워삶아 허영화의 속셈을 뒤집어버림 (욕망)

  • 내기를 포기하겠다고 버티다 세기의 도발에 “선우완 연애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어”로 나섬 (갈등)

[3화]

  • VIP룸에서 여경과의 싸움을 툴툴대다 송주의 노래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바라봄 (감정)

  • 송주가 “성공해도 웬지 독립투사가 될 것 같다”는 말에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흘려넘김 (욕망)

  • 카페에서 여경이 가난한 조선 현실을 들이밀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냐”며 변절자와 독립투사를 뒤섞어 맞받아침 (갈등)

  • 여경이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에 “내 알 바 아니다”라고 버티다 팔 하나 못 쓰게 될 수 있다는 말에 경찰서로 향함 (갈등)

[4화]

  • 내기 관두겠다며 송주에게 “쌀 열섬 사줄게”로 쐐기 박고 방으로 들어감 (갈등)

  • 선우관이 지라시 기사를 읽으며 “방향 잡으면 무섭게 돌진하는 놈”이라고 혼잣말함 (감정)

  • 수현과의 충돌 직후 술김에 밀고자·변절자·배신자를 죄다 쓸어버리겠다며 탁자를 손으로 확 쓸어버림 (갈등)

  • 경성 거리를 만취해 노래 부르며 비틀거리다 바닥에 넘어짐 (감정)

목표2 — 형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믿는 아버지와 이수현을 증오하며 버티려 함 (but 그 증오의 근거가 오해였음을 알게 됨)

[1화]

  • 계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발언에 수저질이 멎다가 이수현 이름을 꺼내 아버지에게 물컵을 맞음 (갈등)

  • 집 앞에서 어린 수현 환영을 보며 잠깐 웃다가 표정이 살벌하게 굳으며 돌아섬 (감정)

[2화]

  • [10년전] 수현과 함께 일본 학생들에게 맞서 싸우고, 형 민과 셋이 여름을 보내며 우정을 쌓음 (감정)

  • [10년전] 선우관이 수현의 유학비를 대주고, 셋이 함께 사진을 찍음 (감정)

  • [10년전] 형의 부고를 듣고 달려와 밀고자가 수현이라는 말을 창밖에서 듣고 눈물을 쏟으며 뛰쳐나감 (위기)

  • 오랜만에 수현과 재회해 대단한 변절자라고 맞받아침 (갈등/감정)

  • 마당에서 송주에게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을 만났다”고 털어놓고 술 한 잔 제안함 (감정)

[3화]

  • 집에 돌아와 계모가 아버지에게 총독부 줄대기를 권유하는 것을 엿듣다 둘에게 경고함 (갈등)

  • 아버지가 수현을 직접 만나보라고 하자 이유를 안다고 죽은 형이 살아 돌아오냐고 비꼼 (갈등)

  • 선우관이 수현이 그럴 놈이 아니라고 하자 총독부 직원이 된 것 자체가 증거라며 대듬 (갈등)

  • 종로서에서 수현이 취조 중인 현장에 들어서며 여경을 건들지말라고 수현을 보며 내뱉음 (감정)

[4화]

  • 종로서 앞에서 수현에게 돌아가 확인하려다 여경에게 손을 낚아채여 끌려감 (갈등)

  • 명빈관 마당에서 수현과 단둘이 마주쳐 비식 웃으며 긴장을 유지함 (감정)

  • 마당에서 수현이 “민이 형이 니 모습을 보면 좋아하겠군”이라고 도발하자 멱살을 움켜쥠 (갈등)

  • 술에 취해 “형... 죽지 마, 형…”을 잠꼬대로 내뱉음 (감정)

  • 수현이 밀고자라는 게 사실로 밝혀질까봐 겁나는 거냐는 아버지 말에 가던 발을 멈춤 (갈등)

  • 절에서 수현과 마주쳐 “내가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야, 형을 밀고한 게 정말 너야?” 묻고 대답을 기다림 (위기)

목표3 —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여경을 모던걸로 만들려 함 (but 여경에게 먼저 마음을 빼앗기고, 내기 사실마저 들켜버림)

[1화]

  • 경성역에서 여자들을 피해 여경을 이용해 빠져나가다 가방을 통째로 빼앗김 (위기)

  • 지라시팀 앞에서 가방을 빼앗긴 여경을 제대로 된 선수라며 감탄함 (감정)

  • 경찰서 복도에서 혼자 발뺌 연습을 하고 들어가다 가방이 열리는 순간 기겁하며 달려듦 (위기/갈등)

  • 경찰서 앞에서 씩씩대는 여경 뒤를 따라나와 머리를 북 긁으며 쫓아감 (감정)

  • 여경에게 통성명을 시도하다 손을 쳐내지고 분을 쏟아내다 주먹을 맞음 (갈등)

  • 카페에서 엇갈린 여경을 뒤늦게 알아보고 돌아와 대화를 몰래 들음 (감정)

  • 최상현 여관 씬을 잠복해 사진을 찍고 기사로 써 탁구에게 갖다 바침 (욕망)

  • 세기의 도발에 발끈해 조마자 내기를 수락함 (욕망)

  • 명빈관 방에 뛰어든 여경과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치다 여경의 총구에 머리를 겨눠짐 (위기)

[2화]

  • 여경을 이불 속에 숨겨두고 수현의 수색을 막아냄 (욕망)

  • 총으로 위협당함/와이셔츠를 벗어 여경에게 던져주고 등을 돌려줌 (위기)

  • 여경 혼자 가겠다는데도 송주에게 떠밀려 에스코트에 나섬 (갈등)

  • 꿈속에서 여경이 옷 벗으라고 하는 장면에 움찔 놀라 깨어남 (감정)

  • 해화당을 찾아갔다가 어머니뻘인 최학희를 발견하고 기겁함 (위기)

  • 최학희에게 돌아가신 어머니 타령으로 접근해 환심을 삼 (욕망)

  • 지라시 사무실에서 여경을 발견하고 숨었다가 그녀가 내기 대상이란 걸 알고 경악함 (위기)

  • 여경에게 그녀의 별칭 ‘조마자’라 불러서 정강이를 걷어차임 (갈등)

[3화]

  • 해화당 앞에서 시집 읽는 척 기다리다 여경에게 들키고 서점에서 세 시간째 시 낭독함 (욕망/갈등)

  • 최학희에게 한복 치수를 재다 여경과 마주치고, 어머니 타령으로 점심까지 얻어먹음 (욕망/갈등)

  • 여경에게 정체가 뭐냐고 추궁당하자 “문학과 우리 옷을 사랑하는 것도 죄냐”로 넘기다 손을 잡아끌며 카페로 데려감 (욕망/갈등)

  • 필성의 눈물에 권투 시합에 떠밀려 나가 하루 종일 싸워 2등을 차지함 (갈등)

  • 시합 후 여경이 고맙다고 하자 쑥스러워하고 음료수 한 잔 사라며 손을 잡아끎 (감정)

  • 사치코가 떠나고 나서 “총독부 관리가 되실 분”이라는 여경의 비꼼에 박치기를 당함 (위기)

  • 근덕에게 안마를 받다 여경이 연행됐다는 소식에 고민함 (갈등)

  • 종로서 취조실에 뛰어들어 강구의 손을 꺾고 “내 여자한테 손대지 마”를 외침 (욕망)

[4화]

  • 취조실에서 여경 옆에 딱 달라붙어 “내 여자”를 선언하고 알리바이를 증언함 (욕망)

  • 여경에게 “밥 줄 생각 없는 주인한테 꼬리치는 멍멍이 노릇 관두겠다”며 내기 포기를 선언함 (갈등)

  • 해화당을 나서며 “잘 살아라, 죽지 말고, 배신당하지도 말고” 혼잣말로 중얼거림 (감정)

  • 지라시 특별호가 경성에 깔린 걸 발견하고 기겁해 달려가 판매를 막으려 함 (위기)

  • 여경이 있는 해화당에 지라시 특별호를 들이려는 남자를 막아서고 머쓱해함 (욕망)

  • 보디가드를 자처해 여경 옆을 붙어 걷다 문맹자 봉사에서 탄원서를 써주는 여경을 바라봄 (감정)

  • 방에 벌렁 누워 바람에 머리 넘기던 여경 모습이 떠오르자 헉 놀라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버림 (감정)

  • 만취해서 잠에 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여경과 눈이 마주치고 피식 웃음 (감정)

누군가 저한테 어떤 서사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저는 구원 서사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구원해주는 이야기. 더 자세히 풀어보라고 하면, “에이 니가 그 작품 한번만 봐~” 이러면서 왓챠피디아에 있는 후기를 읊어주곤 했는데, 이번에 분석하면서 조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제가 좋아했던 구원 서사의 실체는 이거였습니다.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사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을 만나면서 주인공이 회복되는 이야기. 진수완 작가님의 작품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남주가 주요 인물 덕분에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 자체가 바뀝니다.

  • 〈경성스캔들〉 세상을 대하는 방식

  • 〈킬미힐미〉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식

  • 〈반짝이는 워터멜론〉 가족을 이해하는 방식

〈경성스캔들〉에서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배반했으니 신념 자체를 갖지 않기로 한 남자가, 신념뿐인 여자를 만나 다시 흔들리는 이야기. 〈킬미힐미〉에서는 다중인격을 없애야 한다고 믿어온 남주가 내 인격들을 존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는 것. 〈반짝이는 워터멜론〉에서는 청각장애인 아버지가 자신의 음악을 절대 이해 못 할 거라 여겼다가, 그 아버지가 본래 밴드 보컬을 꿈꾸던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죠.

방황하는 남주 옆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을 배치해야 하니, 여주나 서브남주 또는 가족들은 대체로 살아가는 태도가 올바르게 세워진 편입니다. 〈경성스캔들〉 속 나여경과 차송주가 그랬고, 〈킬미힐미〉 속 오리진과 그녀의 가족들, 〈반짝이는 워터멜론〉 속 고시원 식구들이 그랬죠.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
©드라마 〈반짝이는 워터멜론〉

그렇다보니 사람 관계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가 많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로코 때문에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주변 인물들까지 품게 되고, 메인 남녀주연이 나오지 않아도 이야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제가 만약 남자 배우라면요, 진수완 작가님이랑 꼭 일하고 싶습니다. 남주든 서브남주든, 조연 인물이든.. 비중과 관계없이 인생 캐릭터를 갱신해주시는 분이니까요. 특히 남여주의 서사만큼, 남주와 가족 혹은 서브남주의 갈등이 볼만합니다. 이를테면 남주 또는 서브남주의 비밀이 풀리는 과정이 주요 인물들의 관계를 다시 쓰는 열쇠가 됩니다.

  • 〈경성스캔들〉 이수현 → 변절자로 위장한 애물단 수장

  • 〈킬미힐미〉 차도현 → 일곱 개의 인격

  • 〈반짝이는 워터멜론〉 하이찬 → 사고로 인해 청력손실

이렇게 선우완 분석을 끝으로 〈남주가 망가져야 로코다〉 연재를 잠시 멈춰가려고 합니다.

드라마 〈또 오해영〉
©드라마 〈또 오해영〉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두려운 게 하나 있었습니다. 분석하다 보면 결국 한 작가님 작품만 줄줄이 쓰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그 탓에 제 옛날 기억들을 다 곱씹으며 한국 드라마를 더 많이 찾아보고 시청하며 시간을 들였습니다. 초반 1~3편만 해도 일주일 중 20시간 정도를 썼는데, 이윽고 48시간을 넘어 60시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또 오해영〉 편과 〈내 이름은 김삼순〉 편이 특히 그랬습니다. 혹, 깊이가 다르다고 느끼셨다면 아마 그 시간의 차이일 겁니다. 그렇다보니 현생에 치이게 됐고 에세이를 쓰는 데 많은 시간들이 할애되는 지점이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후회남주]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하다 보니 대부분 재벌남주라, 매번 비슷한 전개 구조가 되거나 분석할 거리가 겹치지 않도록 하느라 작품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에 따라 6편과 7편은 후회남주라는 키워드에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재벌남주라는 공통점에 초점을 맞춰 분석한 회차입니다. 쓰다 보니 알게 됐는데, 후회남주는 로코보다 멜로에서 더 선명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치정물일 때 후회의 무게가 더 극적으로 살아나기 때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다시 첫사랑〉, 〈애인있어요〉, 〈비밀〉, 〈발리에서 생긴 일〉,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처럼 또 다른 기준으로 분석해보고픈 작품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 덕후의 에세이 폴더
한국 드라마 덕후의 에세이 폴더

그러고 보면 열 편 모두 클리셰 안에 있었습니다. [#계약 연애], [#기억상실], [#신분 차이], [#신데렐라-백마 탄 왕자님], [#우연한 동거], [#첫사랑 재회], [#직장 내 로맨스], [#적대적 첫만남] …

얼마 전 〈하얀거탑〉과 〈제중원〉을 쓰신 이기원 작가님이 작법서를 내면서 진행하신 북토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클리셰를 클리셰답지 않게 크리에이티브한 맥락을 더하는 게 작가의 역량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도 이번에 열 편을 분석하며 동감한 부분입니다. 잘 만든 로코 작품에서 클리셰는 장치로만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제나 인물의 결핍과 맞물려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클리셰 + 설정 → 둘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반응(왜 이 조합이어야만 하는가)>

〈시크릿가든〉의 신데렐라 설정과 영혼 체인지 클리셰는 함께하며 새로운 힘을 발휘합니다. 신분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몸이 직접 바뀌어야만 상대의 세계를 온몸으로 살아볼 수 있으니까요. 서로의 오해를 가장 확실하게 푸는 방법이었습니다.

〈궁〉의 계약 결혼은 고등학생 둘을 같은 공간에 묶어두는 장치로 쓰였습니다. 거기다 입헌군주제라는 설정이 더해져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는 공식적인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거절도 도망도 할 수 없는 관계에서 감정이 쌓이는 구조입니다.

〈연애의 발견〉의 첫사랑 재회는 술에 취해 전남친 집에서 자버리는 뜻밖의 하룻밤으로 1회 엔딩을 장식합니다. 일로도 엮이니 다정한 현남친이 있음에도 찌질한 구남친에게 끌리는 감정의 비논리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줬습니다.

〈질투의 화신〉의 직장 내 로맨스는 유방암 판정이라는 설정과 만납니다. 일 잘하고 잘난 마초 남주가 가장 무너지기 쉬운 순간을 만들어 그 자리에서 일에 대한 자부심이 사랑의 동력이 되는 구조가 완성됐습니다.

〈또 오해영〉에서 동거 클리셰는 예지력이라는 설정과 만납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통제하려는 남자에게, 한 여자와 엮이는 미래가 자꾸 보이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그 여자가 하필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옆집 여자니, 이 남자의 단단한 마음들이 허물어지게 되는 겁니다.

〈백일의 낭군님〉의 기억상실은 남주의 신분, 목표, 관계를 한꺼번에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쓰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첫사랑이었던 여주를 만나니 또다시 순수한 감정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클리셰 대부분(계약연애, 신데렐라-백마 탄 왕자님, 첫사랑 재회, 직장 내 로맨스, 적대적 첫만남)을 한 작품 안에 담았습니다. 이 많은 클리셰를 버티게 해주는 힘은 코미디였고, 그 코미디의 중심에 자기 영역에서 열심히 일하는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웃겨주는 여주에게 남주도 시청자도 자연스레 스며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성스캔들〉의 내기 연애는 신념 없이 시작한 행동이 어떻게 신념으로 도착하는지를 보여줬습니다.

재벌남주 클리셰를 뒤집는 방법은 강인한 신데렐라가 연약한 왕자님 곁에 서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멋진신세계〉는 타임슬립한 여주가 나옵니다. 보통 타임슬립한 인물은 현대에 적응 못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단심은 내명부를 장악했던 후궁이라 눈치와 판 읽기는 오히려 남주보다 위입니다. 딥페이크 합성물로 오해받으며 사사건건 일이 꼬이던 재벌남주의 판을 풀어주는 사람이 여주였습니다. 〈보스를 지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황장애라는 설정 하나가 왕자님을 구해져야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온갖 알바와 사회 경험으로 다져진 여주가 그 곁에 서는 구조가 됐습니다.

노벨라 블로그 페이지는 댓글을 달 수 있거나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혼자 일기장을 토해내듯 써왔습니다. 종종 왜 이런 날것의 이야기까지 적었냐며 지인들께 핀잔을 들을 정도였지만, 주관적인 감상으로 분석하는 글이다 보니 왜 이 작품인지, 어떤 생각으로 씬들을 이해하게 된 건지 그 맥락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게 됐습니다.

이 글이 여러분께 닿았다면, 어느 날 한 번쯤 좋아하는 옛 한국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게 되셨다면, 이 시리즈를 쓰길 잘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열 편을 함께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

💚

낑깡 작가 (📧)

0원 벌고도 드라마 앓느라 밤새는, 가성비 최악의 프리랜서 작가.

드라마가 밥 먹여주냐고요? 아니요, 제 밥값이 드라마(OTT구독료)한테 갑니다.

그래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웹드라마·웹예능 기획, 전자책 대필 등 글 쓰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제가 쓴 작품에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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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 실은 질풍노도 중이었습니다1회 — 경성 여자들을 10분이면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어!2회 — 개나 소나 다 독립투사군…3회 — 고무신 하나 얻으려다 경성 최고의 스캔들이 된다고?4회 — 밥 줄 생각 없는 주인한테 꼬리치는 멍멍이 노릇 관두겠다고!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선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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