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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사랑한 이야기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⑧— 이율(원득), 세자였다가 기억 잃고 동네에서 제일 쓸모없어진 남자

〈백일의 낭군님〉 이율(원득) 캐릭터 분석. 조선 세자가 기억을 잃고 평민 원득으로 떨어진 뒤에도, 신분 의식·추리력·'왜?'를 묻는 성격만은 그대로 남는 과정을 낑깡 작가가 1~4화 단위로 뜯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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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a Team
Jun 15, 2026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⑧— 이율(원득), 세자였다가 기억 잃고 동네에서 제일 쓸모없어진 남자
Contents
내가 누군지 잊은 채 무능력자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1화 — 신분 의식은 단단한데, 사랑 앞에서는 와르르2화 — 로맨스와 코미디는 0이지만, 기대감을 심어주는 설정들3화 — 지금 나만 불편한가 : 위엄에서 코미디로4화 — 나는 원득이가 아니다, 라는 완벽한 추론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이율(원득)’

💡

지난 7화에서는 〈보스를 지켜라〉의 남주를 다뤘어요!

▶️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 ⑦— 차지헌, 재벌 3세인데 발표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남자

내가 누군지 잊은 채 무능력자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 〈백일의 낭군님〉 남주가 목표를 잃어도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는 이유

기억상실은 한국 드라마에서 정말 오래된 클리셰입니다. 2000년대 멜로 장르를 떠올리면 〈겨울연가〉나 〈천국의 계단〉처럼, 여자주인공이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고, 다시 머리에 충격을 받아야 기억이 돌아오는 전개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연인 중 한쪽이 기억을 잃고, 주변 인물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가며 정체성을 되찾는 여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됩니다.

2018년에 방영한 〈백일의 낭군님〉도 이 클리셰를 메인으로 썼습니다. 조선의 세자 이율이 불의의 사고로 실종되어 평민 원득으로 100일을 살다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낙차가 꽤 큽니다. 왕세자에서 동네에서 제일 쓸모없는 평민으로 떨어지거든요. 혹시 여기까지 읽으면서 혹 떠오르는 작품 있으셨나요? 저는 2006년 작 〈환상의 커플〉이 생각났습니다. 오만한 재벌 안나 조가 기억을 잃고,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장철수의 집에 나상실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부려먹히던 그 드라마요. 신분이 뒤바뀐 인물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구박받으며 살아가는 설정은 〈백일의 낭군님〉과 거의 같은 골격입니다. 현대의 부동산 재벌과 조선시대의 세자가 누리던 권력의 크기는 완전히 다르겠지만, 기억상실로 자신이 가진 권력을 모두 잃은 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본질은 같습니다. 작법 수업에서 들었던 조언 중 하나가, 소재가 막힐 때는 잘 된 작품의 남녀를 바꿔보거나 시대 배경을 바꿔보라는 거였는데요. 그래서 저는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이렇게 열심히 해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오겠죠?

저는 아직 기억상실 클리셰로 작품을 써본 적이 없어서, 남주가 기억을 잃었을 때 되찾아야 할 목표가 명확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개할지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복수도, 사랑도, 정체성도 전부 기억 너머에 있다면 목표를 어떻게 잡고 어떻게 굴려야할까 그려지지 않거든요. 이 작품은 남주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3개의 목표가 1개가 되어버렸는데도 힘있게 흘러갑니다.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지금부터 원득이가 되어버린 조선 세자 이율의 100일을 들여다보겠습니다.

💡

[ 이 글에서 다루는 것 ]

  •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무너지는, 평생 단단했던 무언가

  • 웃음도 설렘도 없는 화가 기대감을 만드는 방법

  • 처지가 바뀌어도 똑같이 “왜?”를 묻는 남자

  •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풀가동되는 명석한 두뇌

  • 여덟 번째 재벌/후회남주 : 이율(원득) 캐릭터 목표 분석

1화 — 신분 의식은 단단한데, 사랑 앞에서는 와르르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처음 마주하는 건 2화 엔딩, 곤장을 맞고 있는 여주 앞에 기억을 잃은 남주가 끌려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그전까지 1화는 온전히 남주의 시간이니, 먼저 그의 행동을 살펴본 뒤 두 사람의 과거 서사로 넘어가겠습니다.

1화 안에서 율을 가장 아끼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좌상 김차언이라는 강력한 악역은 이미 모든 권력을 손에 쥡니다. 조력자는 사라지고 적은 일찍 자리를 잡으니, 율은 처음부터 혼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로움이 이후 율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심하며 움직이는지를 결정하는 출발점이 됩니다.

율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비 아이들을 무사놀이라며 괴롭히는 첫 장면조차,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루는 건 당연하다는 시대적 사고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든요. 이서에게 혼나고도 반성하기보단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라고 발끈하는 반응 역시, 그 시대의 신분 의식을 가진 인물이라면 당연합니다. 사극에서 이런 인물을 만나면 정말 반갑습니다. ㅠㅠ 시대상을 거스르며 처음부터 과도하게 다정하고 평등한 시선을 가진 인물보다, 신분 의식에 충실한 싸가지없는 새싹이 이후 변화할 여지가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제가 로코 속 후회남주를 분석해보고 싶었던 이유기도 하고요.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1회 중

그 신분 의식이 제일 먼저 부딪히는 상대가 바로 이서입니다. 노비와 놀던 중 이서에게 머리를 맞으며 혼이 났으니, 양반의 체면이 구겨진 셈이죠. 율은 앙심을 품고 무서운 사내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끌어들여 골탕을 먹이려 합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었는지, 비가 내리는 밤에 넘어지고 구르며 혼자 그녀를 찾아 나섭니다. 이서는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이상한 사내와 멀쩡히 잘 있었고, 자신이 골탕을 먹인 장본인임에도 율의 상처 입은 팔을 댕기로 묶어줍니다. 그 손길에서 율은 죄책감과 호기심을 넘어, 뭔가 더 묘한 감정을 품게 된 것 같습니다. 이윽고 벚꽃나무 아래에서 이서에게 “내 너와 혼인할 것이다”라고 진지하게 선언하니까요.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1회 중

아직 사랑이 뭔지도 모를 나이에 이런 선언을 내뱉게 하다니, 보는 사람 입장에선 “아니, 이 아기들이 지금 뭘 안다고”라는 헛웃음과 동시에, 이 다짐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다시 돌아올 거라는 예감을 들게 합니다.

여기서 빠질 수 없는 게 벚꽃나무입니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벚꽃은 거의 필승 장치거든요. 제가 5편에서 분석했던 〈또 오해영〉을 포함해,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최고의 사랑〉, 〈쌈, 마이웨이〉까지,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떠올려보면 죄다 흐드러지는 벚꽃잎 아래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쌓이고 터집니다. 〈백일의 낭군님〉에서도 이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1회 중

1회 엔딩에서 세자가 된 율이 거리에서 홍심(=이서)을 마주치는 순간에도 벚꽃잎이 날립니다. 같은 배경이 반복되면서, 처음의 고백은 이후에도 계속 환기되는 정서로 남습니다.

2화 — 로맨스와 코미디는 0이지만, 기대감을 심어주는 설정들

로맨스를 기대하고 2회를 보셨다면 약간을 실망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남주는 여주를 눈 앞에서 놓쳐버리거든요. 그렇죠, 벌써 만나면 이야기가 전개가 안되겠죠!

대신 2화는 율의 감정과 머릿속을 따라가는 화입니다.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내 용포와, 그 아이의 목숨을 맞바꿨으니…”

성인이 된 율에게 이서를 향한 마음은 죄책감으로 똘똘 뭉친듯 합니다. 그날, 자신이 왕친의 이름으로 군졸들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이서의 가족은 더 빨리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율에게는 이서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곧 자신의 죄가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제발, 살아있어 달라는 실낱같은 바람이 그를 움직이는 거죠. 그 바람을 품은 채, 이 화는 또 다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하는가.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1회 중

독살을 시도한 배후 후보는 여럿입니다. 아버지가 새로 들인 중전도, 배다른 동생도, 좌상 김차언도 모두 그 후보입니다. 그 중 좌상은 가장 가능성이 낮아 보입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2회 중

자신의 딸을 빈으로 들인 이상, 사위인 율을 죽이는 건 곧 딸의 자리까지 함께 무너뜨리는 일이니까요. 그러니 율도 처음엔 좌상을 목록에서 지웁니다. 그런데 연회에서 김차언이 올린 궁시가 내의녀를 죽인 화살과 같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김차언에게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답을 찾는 과정에서 율이 주목한 사람은 세자빈 소혜입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2회 중

그녀는 1화부터 줄곧, 세자로서 해야 할 일을 먼저 말하는 아주 T같은 사람입니다. 후사가 없으면 완벽한 국본이 될 수 없다며 합방을 청하는 장면에서도, 그 절박함의 방향은 애정이 아니라 의무 쪽을 향해 있습니다. 율은 이 부자연스러움을 놓치지 않습니다. 의안을 뒤져 소혜가 두 번이나 정기 검진을 피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회피의 패턴 안에서 답을 찾아냅니다. 합방 한 번 없이 회임을 했다는 것. 직접 내의녀를 데리고 소혜의 처소를 찾아가 진맥을 명하고, 소혜가 끝내 진맥을 거부하는 순간, 확신합니다. 세자가 비밀을 알아챘다는 건, 곧 그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좌상의 입장에서는, 세자를 사고로 위장해 제거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생겼습니다. 율 입장에서도 이제 패가 모였습니다. 세자빈의 회임 사실을 쥐고 있으니, 좌상 가문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죠. 범인을 밝히기만 하면 됩니다. 그 순간, 아버지인 왕이 그 길을 가로막습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2회 중

지금 바로, 기우제를 다녀오라는 명을 내리거든요. 이제 막 실마리를 잡았는데.. (한숨) 궁궐안엔 죄다 방해꾼들 뿐입니다.

보다 보면, 묘한 갈증이 생깁니다. 율이 있는 곳엔 코미디가 없거든요! ㅠㅠ 분명 이 작품 메인 장르는 로맨스코미디인데, 궁궐 안에서 세자는 매번 진지하고 무겁고, 음모와 정치, 죄책감과 원망만을 마주합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남주가 차라리 이 공간을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래서 천우산에서 화살을 맞고 추락했을 때 어떡해.. 이런 마음보단 아싸! 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렇게 떠밀려간 곳엔 홍심이가(→ 율의 첫사랑, 이서)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있었거든요. 영문도 모르는 채 그 마당으로 끌려 들어오는 율의 얼굴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3화 — 지금 나만 불편한가 : 위엄에서 코미디로

주인공이 내뱉는 첫대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보통 주인공의 욕망이나 목표나 성향을 드러내는 대사거든요. 성인이 된 율의 첫 대사는 “지금 나만 불편한가” 입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1회 중

1화에서는 위엄의 표현이었습니다. 동궁전 안에서 누구도 감히 토를 달지 못하는 세자의 말이었으니까요. 3화에서 같은 대사가 다시 나옵니다. 똑같은 말투인데 처지가 완전히 달라져서인지, 이번엔 그 대사를 들으며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3회 중

기억을 잃었어도 율은 여전히 뭘 하든 이유를 찾는 사람입니다. 눈을 떠보니 낯선 곳이고, 자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의 말을 따라 왔더니 혼인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몸은 있는데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 그 낯섦 탓에 이 마을 어디에도 섞이지 못합니다. 낯선 여인과 혼인해야 한다는 말에도 “그럴 리 없다”는 확신부터 내세웁니다. 그 확신 끝에는 늘 같은 말이 따라붙습니다.

“어쩐지 직관적인 느낌이 그렇다.”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매번 이 말로 자신의 판단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 게 원득이 된 율의 입버릇입니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엔 그 확신을 뒷받침할 근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이 여인과 혼인해야 하는지, 왜 이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그 무엇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말은 불편하다 뿐인 겁니다. 도망치려고 돌아서다 개똥을 밟고, 두엄 더미 위에 철퍼덕 주저앉고, 씻으러 간 계곡물은 차갑고 깊다는 이유로 거절합니다. 더 얄궂은 건, 이 모든 혼인 소동의 근거가 다름 아닌 왕세자의 명이라는 점입니다. 그믐까지 모든 원녀 광부를 혼인시키라는 명령에, 스스로가 걸려든 것입니다. 코미디 점수 드립니다…!

자신이 빠진 상황에서 도망치고자 한 율의 마음을 움직인 건 역시나 여주였습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3회 중

“네가 가버리면 난 박영감의 다섯 번째 첩실이 될 거야. 할아버지뻘 되는 사내에게 농락당하고 싶지 않으니, 구해줘.”

율은 이유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3화 내내 불편하다고 버텼던 것도, 납득이 안 되면 한 발짝도 안 움직이는 성격 때문이었죠. 구해달라는 말이 그 이유가 됐지만, 그렇다고 바로 혼인에 응한 것도 아닙니다. 일단 고비를 넘기자는 말로 한 발짝만 내딛었을 뿐이죠. 홍심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붙잡아주고, 관아로 가는 길도 기억이 안 난다며 슬쩍 따라가고, 홍심 손에 잡혀 빨간 노을 속으로 뛰어가다 보니, 어느새 혼례 자리에 서 있게 됩니다. 납득해서가 아니라, 한 발짝씩 따라가다 보니 거기까지 와버린 겁니다.

4화 — 나는 원득이가 아니다, 라는 완벽한 추론

4화는 원득의 적응기.. 아니 율의 부적응의 연속인 코미디로 전개됩니다. 혼례 때 신었던 흑화가 편하다는 이유로 반납을 거부하고 도망치고, 짚신은 착화감이 나쁘다며 또 거부합니다. 장터에서는 비단과 최고급 이불을 골라놓고 돈이 없다고 하다가 왕소금을 맞고, 국밥을 먹고는 윙크 한 번으로 값을 치렀다고 우깁니다. 기억소실이 아니라 어디가 모자란 거 아니냐는 물음에도 당당합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4회 중

“그럴 리가. 나는 평생 어디가 모자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자신감과 현실 사이의 낙차가, 4화 내내 반복되는 웃음의 패턴입니다. 장터에서 만난 자모전가(=조선의 사채업자)는 영이 맑아 보인다며 형제의 정을 맺자고 접근하는데, 그 말에 홀린 율은 손도장을 찍습니다. 빚은 서른 냥, 초가집 한 채 값입니다. 낫을 들고 달려드는 여주 앞에서도 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돌이 옆구리를 찔러야 겨우 무릎이 꿇립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안목과 취향으로 꾸민 나의 방이라고 우기곤 하니까요.

율이 이렇게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뻔뻔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분석해봤는데요. 그건 여자주인공인 이서(=홍심)의 설정값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마을 안에서 빈틈없는 인물입니다. 영리하고 상황 대처가 빠르고,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호감을 삽니다. 스스로 위기를 만들 일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 탓에 위기는 언제나 남주 쪽에서 옵니다. 빈틈없는 여주인공을 설정했다면, 그 옆엔 망가질 상황에 끊임없이 내던져지는 남주가 필요하다는 걸,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양반이 지나가자 구돌과 끝녀가 허리를 깊이 숙입니다. 율도 따라 숙이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동작이라, 감각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 추론은 곧 자신이 원득이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원득이라는 이름을 불러도 몸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고개 숙인 적이 없다는 것, 여주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도 자신의 심장이 평온하다는 것까지. 모두 자신이 원득이가 아니라는 증좌라는 것입니다. 2화와 똑같은 방식으로 단서를 모아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게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시작된 거라는 게 참 헛웃음 나오게 만듭니다.

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이율(원득)’

욕망

인물이 간절히 원하는 것

위기

예상치 못하게 닥친 사건

갈등

그로 인해 발생하는 내적/외적 충돌

감정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변해가는 마음의 결

목표1 — 정체성 — 자신이 누구인지(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증명하고 싶음 (but 기억을 잃어버려 평민 원득이 됨)

[1화]

  • 어머니에게 “고난에 빠진 백성이 우선”이라며 근엄한 연기를 펼침 (욕망)

  • 맹나인에게 “단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며 자신의 위치를 과시함 (욕망)

  • 수업에 집중 못 하는 자에게 벌칙으로 문제를 내고 함구령을 내림 (욕망)

  • 대신들에게 장미 화채를 대접하며 흉통과 합방 거부를 정당화함 (욕망)

  • 가뭄 해결책으로 팔도의 원녀 광부를 모두 혼인시키라 명함 (욕망)

  • 왕에게 합방 거부의 이유로 좌상을 걸고넘어지며 강압을 거부함 (갈등)

  • 좌상의 상소에 정면으로 맞서며 국본으로서의 입지를 지켜냄 (갈등)

[2화]

  • 연회를 열어 대신들의 궁시를 받아 화살의 출처를 추적함 (욕망)

  • 서원의 죽시와 김차언의 호시를 비교해 독살 배후를 확신함 (위기)

  • 소혜를 찾아가 회임 사실을 추궁하며 압박함 (갈등)

  • 기우제 명을 거부하려다 따르며, 부친에게 처음으로 원망을 토로함 (갈등)

  • 천우산 습격에서 동주와 옷을 바꿔 입어 추격을 따돌리려다 화살에 맞아 떨어짐 (위기)

  • 산속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정신을 차리지만 기억을 잃음 (위기)

[3화]

  • 형틀에서 풀려난 홍심을 무심히 본 채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감 (위기)

  • 박영감 저택에서 자연스럽게 목욕·식사를 마치고 음식 평을 남기고 떠남 (욕망)

  • 혼인할 생각이 없다 말하다 홍심의 “기억소실” 거짓말로 상황이 정리됨 (위기)

  • 물레방앗간에서 자신과 홍심의 과거를 설명받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음 (위기)

  • 첫날밤 손끝 하나 닿지 말라 선을 그었으나 결국 함께 잠들고, 다음 날 벗겨진 자신을 발견함 (갈등)

  • 누더기 저고리와 죽 한 그릇으로 천애고아 신세임을 알게 됨 (위기)

[4화]

  • 장터에서 최고급 물건을 골랐으나 돈이 없어 소금을 맞고 쫓겨남 (위기)

  • 배숙이 뭔지 입에서 맴돌지만 떠올리지 못해 팔푼이로 의심받음 (위기)

  • 자모전가 사내에게 형제의 정을 빙자해 서른 냥 빚을 지고 집을 호화롭게 수리함 (욕망)

  • 박영감 일행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다가, 자신이 원득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품음 (위기)

  • 천우산에서 물독을 지다 김차언·장문석을 마주치고 두통으로 쓰러짐 (위기)

목표2 — 관계 — 좋아하는 여인을 지키고 싶음 (but 기억을 잃어 ‘왜 지켜야 하는가’의 이유를 찾지 못함)

[1화]

  • 어린 시절, 노비를 괴롭히다 이서에게 혼나며 첫 만남을 가짐 (위기)

  • 어린 시절, 동주에게 이서에 대해 “탐정놀이를 해야겠다”며 뒤를 캐고 다님 (욕망)

  • 어린 시절, 이서와 함께 벚꽃나무 아래에서 혼인을 약속함 (욕망)

  • 어린 시절, 아버지가 능선군에서 왕이 되던 날, 윤부준 일가가 역적으로 몰려 몰살당함 (위기)

  • 시전에서 우연히 이서를 발견, 벚꽃나무 아래에서 재회 (감정)

[2화]

  • 이서와 닮은 여인을 쫓아갔으나 놓치고, 동주에게 윤부준 가문의 생존자를 다시 찾아보라 함 (감정)

  • 밤에 홀로 이서의 댕기를 꺼내 보며 복수를 다짐함 (감정)

[3화]

  • 없음

[4화]

  • 멍석에 함께 말려 쥐 소동을 겪은 뒤 함께 굴러 빠져나옴 (감정)

  • 각방을 쓰자는 홍심과 방의 소유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임 (갈등)

  • 빚을 갚으라는 일들을 모두 거부하며 갈등이 격해짐 (갈등)

  • 자신이 원득이 아니라는 증좌를 대며 다가가다 심장이 뛰는지 묻는 묘한 순간을 만듦 (감정)

  • 연모했던 기억을 떠올려달라 청하고, 두통으로 쓰러져 홍심의 품에 안김 (감정)

목표3 — 비밀 —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을 단죄하고 싶음 (but 죽음의 위기에서 기억을 잃어버림)

[1화]

  • 탕약을 의심해 잠행을 시도하다 독살 시도임을 알게 됨 (위기)

  • 금기 식재료를 빼돌린 내의녀 송선을 직접 찾아 배후를 추궁함 (욕망)

  • 송선이 답을 말하기 직전 화살에 맞아 죽고, 무연을 쫓다 놓침 (위기)

[2화]

  • 내의녀 살해 사건의 단서(소혜의 처소 배정, 검진 회피 기록)를 확인함 (욕망)

  • 제윤에게 더 이상 사건을 조사하지 말라 명함 (갈등)

  • 소혜를 찾아가 회임의 비밀을 들춰내며 좌상 가문을 무너뜨릴 패를 쥠 (욕망)

[3화]

  • 없음

[4화]

  • 천우산에서 김차언·장문석을 마주치며, 위협자들과 무의식적으로 재회함 (위기)

다른 1~7화랑 달리, 목표를 분석하며 저도 고민이 많았던 부분인데요. 율이 기억을 잃은 채 원득으로 살게 되면서 기존의 인물 목표를 다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분석하기로 하고 약간 후회했습니다. 적을 내용이 없을까봐요.

그런데 이 빈자리를 정제윤이 조금씩 채우더라고요. 1화 끝에서 율이 낸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고, 2화에서 내의녀 살해 사건을 추적하던 그 인물이, 율이 사라진 자리에서 계속 단서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만약 율이 기억을 잃은 채로도 추리와 복수를 병행해야 했다면, 홍심과의 관계는 그만큼 뒷전으로 밀렸을 텐데.. 서브남주가 그 역할을 이어받은 덕분에, 3~4화에서 율은 낯선 환경이 불편하다는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로맨스에 무게를 싣고 싶다면, 남주의 다른 목표를 누군가에게 분담시키는 것도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대본집을 살펴보며 끝내 알 수 없었던 게 있습니다. 초반 여주의 감정입니다. 4화에서 벚꽃나무 아래에서 여자주인공이 “어릴 적 혼인 약조를 했다”, “너를 기다렸다”는 말을 꺼내는 장면인데요. 이 말은 과거 자신이 어린 율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하는 부분도 있기에 완전한 거짓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2화에서 율의 시점으로만 보여줬기 때문에, 이서가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한 번도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았거든요. 1~2화의 무게를 생각하면 3~4화에서 가볍게 넘어가고 싶었던 것도 이해가 가지만, 이 지점만큼은 이서의 시점이 조금 더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드라마 〈백일의 낭군님〉 4회 중

애초에 이 대본집을 사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여자주인공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배우고 싶어서였는데, 이서의 감정은 지문으로 표현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메이킹이나 배우의 해석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들을 더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물론 그 공백을 남지현 배우가 자연스럽게 채워주고 있다는 건, 화면만 봐도 느껴지지만요.

〈백일의 낭군님〉은 매 화마다 기억을 잃어도 변하지 않는 것을 하나씩 짚어갑니다. 신분 의식, 추리력, 성격, 그리고 그 추리력이 정반대의 목적으로 쓰이는 모습까지. 처음 정주행할 때는 그저 재미있는 코미디로 봤던 장면들이, 다시 보니 전부 같은 질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을 잃어도 남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게 결국 이 사람을 이 사람으로 만드는가.

+ 만약, 이 작품을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티빙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3화나 4화부터 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4화의 경우 앞부분에 1~3화 하이라이트도 있어요. 1화는 로맨스 20퍼 코미디 70퍼 정치사극 10퍼의 비율로 전개되거든요. 2화는 거의 정치사극으로 흘러갑니다.

〈남자주인공이 망가져야 로코다〉는 매주 월요일에 정기 발행될 예정입니다!

다음 편에서 다룰 인물은, 본명보다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립니다.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어느 날 한 여자와 부딪혔는데, 그 과정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양복에 걸리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바로 가위로 잘라버립니다. 이에 망고!무스!케이크가 그의 얼굴 정면으로 날아옵니다.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닦던 중 맛을 보게 된 그는, 케이크를 던진 그 여자를 쫓아가게 됩니다. 머리카락을 자른 사과가 아니라, 이 맛있는 케이크를 만든 여주를 자신의 레스토랑 셰프로 섭외하기 위해서요. 로코는 이런 황당한 인연에서 시작되는 게 제일 재밌지 않나요? 다음 편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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낑깡 작가 (📧)

0원 벌고도 드라마 앓느라 밤새는, 가성비 최악의 프리랜서 작가.

드라마가 밥 먹여주냐고요? 아니요, 제 밥값이 드라마(OTT구독료)한테 갑니다.

그래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여서, 웹드라마·웹예능 기획, 전자책 대필 등 글 쓰는 건 다 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제가 쓴 작품에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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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la의 로고. 왼쪽에는 서로 겹쳐진 세 개의 별표(*) 모양이 초록색 그러데이션으로 배열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둥글고 간결한 고딕체로 “Novela”라는 영문 텍스트가 검은색으로 쓰여 있다. 로고 전체는 부드럽고 현대적인 인상을 주며, 창작과 아이디어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느낌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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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내가 누군지 잊은 채 무능력자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1화 — 신분 의식은 단단한데, 사랑 앞에서는 와르르2화 — 로맨스와 코미디는 0이지만, 기대감을 심어주는 설정들3화 — 지금 나만 불편한가 : 위엄에서 코미디로4화 — 나는 원득이가 아니다, 라는 완벽한 추론캐릭터 목표 분석 — 후회남주 ‘이율(원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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